生의 힘든 모퉁이를 돌 때면

생(生)의 힘든 모퉁이를 돌 때면 생각나는 여자아이 순지(가명)가 있다. 이젠 아이도 아니지.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니, 죽지 않았다면 나와 똑같이 나이를 먹었겠지. 기억이란 원래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재구성해서 기억하므로 이 글 또한 그러할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동네에서 한복 삯바느질을 하는 여자가 어머니에게 돈을 빌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돈을 언제 쯤 갚을 건지 물어라도 봐야겠다며, 언덕에 있는 그 여자 집으로 올라갔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 삯바느질을 하는 집은 동네에서도 제일 높은 골목의 끝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다. 어머니가 안에 누구 안계시냐고 하자, 반 쯤 열려져 있는 부엌문 안에서 기척이 나면서 방문이 열렸다. 연탄가스 냄새가 났지만, 콩만 한 부엌은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 창백하고 뼈만 남은 한복 입은 여자가 방바닥에 천을 펼쳐놓고 한복을 재단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세상사람 같지 않았다.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그 뼈만 남은 여자의 옆에서 순지가 밥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순지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잠시 놀라는 듯 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영희야, 안녕!’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순지는 우리 반에서 일등을 하는 아이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순지가 한복 삯바느질하는 집 딸인지 알았다. 부엌 딸린 단칸방 하나에 폐병 든 어머니와 오빠와 언니와 여동생, 이렇게 다섯 명이 살았다. 그녀와 별반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가족 구성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합창반, 악대부, 체육부, 환경미화 등 교외 활동을 늘 같이 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순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초등학교 육학년 때 공부를 제일 열심히 했을 것이다. 순전히 순지를 이겨 보려는 욕심에서.

순지는 늘 오빠 언니 자랑을 했다. 오빠가 공부를 잘해 내년에는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그녀의 언니도 전교에서 일등을 하며 장차 의사가 될 거라고 했고, 자기 아버지는 큰 사업을 하는데 지금은 미국에 계신다고 했다.

어머니가 순지의 집으로 돈을 받으러 간 이 후, 그녀는 나와 굉장히 친한 척 했다. 어느 날 내가 없는데도 나를 찾아온 그녀는 어머니에게 밥상까지 얻어 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내 책상에는 앉지 않았다. 난 가죽으로 된 등 높은 초록색 회전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고 그녀는 밥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그녀를 이겨 본적이 없다. 양 옆으로 덧니가 났고, 얼굴도 검은 편이고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입만 큰 편이었다. 순지는 자기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순지의 우리 집 출입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갔다. 물론 뺑뺑이를 돌려 들어간 중학교는 서로 다른 학교였다. 그러나 내가 집에 없을 때도 순지는 내방에서 공부를 했다. 난 어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순지는 니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느냐고. 난 내 방에 들어가면 화가 난 듯이 항상 순지를 등지고, 등 높은 회전의자에 앉아 딴 짓을 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난 소설책을 읽거나 시를 썼다.

중학교 삼학년 때 그녀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돌아가시자, 순지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더 이상 내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난 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운한 느낌도 없었다. 그냥 그 처연하게 아름다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마음이 좀 아팠다.

그녀는 분명 ‘경북여고’(우리 때까지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에 들어갔을 줄 알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그녀를 화장실에서 만나 깜짝 놀랐다. 내가 들어간 여고는 이차였으므로 경북여고 떨어지고 온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경북여고 떨어진 게 아니고 이 학교에서 전면장학생으로 오라해서 왔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그런데 2학년 올라가면서 순지는 학교에서 사라졌다가 2학년 말에 다시 돌아왔다. 내가 다닌 여고는 가톨릭 재단이었다. 어느 날 교리를 담당하는 사복 입은 수녀님이 나를 불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순지와 초등학교 동기라는 걸 알고 내게 순지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순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 거짓말을 잘 했냐는 것이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내가 질문을 하자, 순지가 서울로 입양을 갔다가 거짓말을 너무 해서 파양되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너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녀가 초등학교 때 거짓말을 잘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경북여고를 나온 초등학교 동기 하경을 만났다. 하경은 순지와 중학교 동기였다. 하경은 순지가 경북여고 떨어져서 내가 다닌 이차여고에 들어갔다고 했다. 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구십 프로가 거짓말이라고 보면 된다고도 했다. 오빠가 미국 유학을 갔다거나, 언니가 장학생으로 의대를 갔다거나, 여동생이 서울의 부잣집 외동딸로 입양 됐다거나 하는 말들이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순지의 말대로 전면 장학생에 생활비까지 받으면서 여고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이십 대 초반 때의 소문은 그녀는 재수를 해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십대 때 들은 풍문은 그녀가 교수가 된 게 아니고 자기 남편이 교수라고 만나는 동창들에게 얘기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하는 하경은 순지가 정말 이화여대를 들어갔는지는, 학적부를 떼보지 않은 이상 믿을 수 없고, 그 남편이 교수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경은 순지의 말을 거의 믿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두 번 속았냐고 했다.

그런 순지가 왜 나는 생의 힘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생각이 날까. 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첩실’이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끼에 발등이 찍히듯, 그녀 가슴 속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몽땅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지천명이 지난 나이에 이해가 되다니. 난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순지는 그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가슴의 한 방에 밀어 넣고 굳게 빗장을 건 뒤, ‘희망’이라는 방문만을 활짝 열어 놓았던 것이다. 삶의 비밀을 이미 보아버린 ‘어린영혼’은 거짓말로 자신을 위무 했을 것이다. 비록 방법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한번 시킨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거짓말을 지어내고 또 지어내고 했을 것이다. 

나라고 삶의 짠맛 쓴맛을 비켜지나갈 리 없다. 생의 힘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거짓말을 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남편은 사업차 미국에 가 있고, 아들은 서울대 나왔고, 지금은 삼성맨이라고 순지처럼 함박웃음을 웃으며 말이다. 실상은 남편은 중국 사업을 접고 실속 없이 미국을 들랑거리며, 아들은 삼수해서 겨우 경기권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작은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있다.

그러나 나는 비록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내 상황을 약간 미화해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남편은 늘 외국으로 돌아다니느라 바쁘고, 아들은 탄탄한 중소기업에 잘 다니고 있고, 나야 늘 책을 보고나 글을 쓰거나 상담을 하며 지내지, 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해피한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 비관적으로 말해 봐야 아무런 덕이 안 되고 기분만 더 우울해진다는 걸, 순지는 열두 살에 알고 나는 이제 안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거듭하다보니 습관이 되어, 늘 맑고 행복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 가끔은 ‘불안’이 나를 집어 삼키려고 으르렁 댈 때도 있지만, 말을 희망적으로 하다 보니 정말 남편이 곧 대박을 터뜨릴 것 같고, 아들이 훌륭한 회사에 다니는 것 같고, 나는 부유하게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뼈 속까지 ‘부르주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지가 이화여대를 들어갔는지, 교수남편을 만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쯤 행복하고 편안하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이 새벽 그녀의 아프고 외로웠던 ‘어린영혼’에게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보낸다.

정영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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