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웃다가 울컥했다. 김훈은 배고픈 시절의 라면  맛을 떠올리게 했고 안 먹던 라면을 먹게 했다. 라면을 한 끼의 일용한 양식으로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었지만 김훈이 일러준 레시피대로 그 날 저녁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자세한 조리법을 다 적을 수는 없고 대충 물은 넉넉하게 붓고 분말스프는 삼분의 이만 넣고 대파를 많이 넣고 센 불에 삼분. 마지막에 계란을 넣고 삼십초 후에 먹으면 된다. 이렇게 엄숙하고 진중하게 라면 끼니에 대해 적을 수 있다니. 웃다가 눈물이 났다. 
제일 웃기는 건 ‘수영장에 물이 많아야 수영을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라면 물을 넉넉하게 부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한참을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칼의 노래’였다. 얼굴을 직접 본 건 지인의 결혼식장인 어느 성당에서였다. 물론 서로 모르므로(아니지 나는 알고 그는 나를 모르므로) 먼발치서 쓰윽 일별만 한 사이였다. 성당 혼례미사가 길어지자 그는 몇몇 사람들과 먼저 성당을 빠져나가며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는 얼굴이므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는 나를 모르므로 무심한 눈빛으로 지나쳤다. 그래도 그 한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눈빛을 나는 오래도록 아껴가며 기억했다. 그의 얼굴은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진기 없이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모든 에너지 혹은 욕망은 오로지 그 눈빛에만 모여 있는 듯 했다. 
나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왠지 ‘칼의 노래’는 사 봐야할 것 같아 잠실의 교보문고에 직접 가서 샀다. 두 권짜리였다. 저녁을 먹고 9시쯤부터 별 결의나 다짐 없이 ‘칼의 노래’를 펼쳐든 나는 그 날 밤을 꼴딱 샜다. 급기야 새벽에는 책상과 장롱 사이에 끼여 앉아 오열했다. 얼마 만에 책을 읽고 오열까지 한 것인가. 이순신 장군 때문에 울은 게 아니라 김훈의 문장 때문이라고 해야 하리라.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처절하게 묘사한 그 문장 말이다. 나는 완전히 그 책의 저자에게 인질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김훈은 내 영혼의 인질범인 셈이다. 

‘칼의 노래’서 그의 문장에 영혼 사로잡혀 
2004년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구입해서 작업실 겸 ‘영희역학연구원’을 개원했다. 작은 오피스텔에 입주할 때 사놨던 라면이 십년 넘게 싱크대 아래 그대로 있었다. 어느 날 후배가 어중간한 시간에 오피스텔에 들러 출출하니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다. 싱크대 아래 있는 라면을 끄집어냈는데 모두 십년이 넘은 것들이었다. 후배는 기절하며 당장 버리라고 했다. 알았다고 말하고는 아까워 뒀었다. 그 후배는 시원하고 칼칼한 ‘굴짬뽕’을 시켜 주었다. 
다음 날 정말 십년이 넘은 라면을 끓여 보았다. 절은 닭기름 냄새가 역하게 나서 먹을 수 없었다. 라면은 썩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완벽한 공산품인 플라스틱의 일종으로 생각한 라면이 비로소 생명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미 죽은 라면 다섯 개를 모두 버렸다. 
십 여 년 동안 오피스텔에서 한 번도 라면을 끓여 먹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철이 들면서부터, 아니 결혼해서 아들을 키우면서부터 라면은 섞지 않는 플라스틱의 일종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라면은 무조건 몸에 해롭다는 등식. 그래서인지 아들은 엄마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 두어도 라면을 끓여 먹었다. 너무 못 먹게 한 ‘라면결핍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완전 공감이 되었고, 급기야 울컥하기까지 했다. 
나 또한 라면을 노란 양은냄비에 끓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물론 그 전에 라면이 생산되었지만 내가 직접 끓여 먹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인 것 같다. 
그때 우리 집 부엌에는 가스불이 아니고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늘 석유곤로의 불 조절을 못해 노란 양은냄비는 시커멓게 그을리고는 했다. 라면이 다 익기도 전에 왼손에 들고 있는 냄비뚜껑에 건져 올려 먹던 그 꼬들꼬들한 라면 발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나도 어머니가 부재 시엔 얼씨구나 라면을 끓여 먹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파도 넣고 계란도 넣고 떡국 떡도 넣어 먹을 줄 알았다. 언제나 라면이 다 퍼지기도 전에 거의 반은 냄비 뚜껑에 건져 먹고는 했다. 나머지 반은 비로소 익혀서 먹고, 다시 밥을 말아 신 김치와 먹었다. 혼자 먹을 땐 그릇에 담지도 않고 언제나 시커멓게 그을린 노란 양은냄비 채 먹었다. 
또한 고3 때, 미술대학을 가기 위해 화실에 다닐 때 그 조개탄을 넣은 난로에 끓여먹던 라면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그 때도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탁자에 놓여 있던 노란 양은냄비에 끓여 먹었다. 그 시절에는 어쩜 그렇게 늘 춥고 배가 고팠는지. 남학생들은 그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아마 그들은 지금 쯤 그 때 먹었던 소주 맛이 일생에서 최고였다고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나보다 딱 십년 먼저 태어났다. 1948년생이라고 당당하게 책날개에 밝힌 그가 멋있다. 나이를 많이 먹는 게 죄는 아닌데, 출판사에서는 여성작가의 출생년도를 적지 않는다. 책을 사보는 삼십대 전후의 독자들이 노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나이를 많이 먹으면 멍청해진다고 여기는데 내가 보기에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아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치매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유한한 생명체라면 누구나 비켜갈 수 없는 나이를 부끄러워해야 하다니. 하기야 돼지(돼지에게 미안!)처럼 나이만 먹는 인간도 많지 않은가. 남이 보기에 나도 돼지처럼 나이만 먹은 늙은 여류작가일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무튼 ‘칼의 노래’ 이후 그의 인질이 된 나는 그의 책들이 출판되는 족족 다 사다 읽었다. ‘꽃들만 가득한 정원에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누군가 김훈의 등장을 그렇게 표현했다. 공감한다. 그의 단단한 문장들은 숨을 멎게 하는 데가 있다. 잘 벼린 단검은 살갗을 스칠 때 고통이 없다. 그러나 몇 초 후 뜨거운 피가 흘러내릴 때 쯤 고통을 느낀다. 
그의 문장은 잘 벼린 단검 같아, 누군가를 고통 없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문장은 잘 벼린 칼, 독자들 숨 멎게 해 
소설 ‘개’를 보면서도 ‘개’가 이순신 장군처럼 영민하고 멋있어 잠시 눈을 감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묘사한 김훈의 문장 때문이겠지만. 나의 졸고 ‘낮술’이라는 소설집이 출간될 때, 출판사 편집장에게 표지의 글씨를 ‘개’ 같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물론 ‘낮술’ 표지의 글씨가 ‘개’ 같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해 문화관광부가 추천하는 ‘청소년 우수도서‘에 선정되어 기뻤다. 
건강검진을 하면 언제나 콜레스테롤에 빨간 글씨가 찍혀 나오고, 두툼한 뱃살이 만져질 때면 괜히 김훈에게 부끄러워졌다. 그의 얼굴과 문장엔 기름기가 없다. 다시 말해 탐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해 주었다. 
토요일인 오늘도 오후에 상담이 있었다. 상담이 끝난 시간이 오후 5시 쯤 이었는데, 두어 시간 말을 하다 보니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MSG는 ‘맛있지’의 이니셜이란다. 배가 몹시 고프거나,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을 때 그 강렬하고 가열 찬 화학조미료 MSG가 생각난다. 
김훈의 레시피대로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서 하얀 백자 그릇으로 옮겨 담아 50여 년 간 우리들의 일용한 양식이었던 라면을 ‘공손하게’ 먹었다. 코를 풀며 먹었다. 나는 인질범을 사랑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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