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었기에 미래예측은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연원을 살펴보면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델포이(Delphoe) 델포이(Delpoe) 또는 델피(Delphi)는 신탁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인데 미국 랜드연구소에서 개발한 미래예측의 대표적인 방법론인 델파이 기법(Delphi method)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고대 델포이 신탁에서 시작 
아폴론 신전에는 신전을 지키는 피티아(Phythia)라는 여사제가 있었다. 
그녀는 방문자에게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해주는 이른바 ‘신탁(오라클, Oracle)’을 내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탁(神託)이란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인간의 물음에 대한 신(神)의 응답’을 말한다. 
‘델포이의 신탁’은 신화 속의 이야기지만 미래예측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상(representation)’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폭군 타르퀴니아왕 통치시절 왕에게 예언서를 팔았던 ‘시빌의 전설’도 유명하다. 바로 ‘시빌의 신탁서(Sibyl’s oracle)’이다. 
이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노파가 아홉 권의 책을 들고 왕을 찾아왔다. 
이 노파는 무슨 내용이 담긴 책인지도 말하지 않은 채 엄청난 가격을 요구하며 책을 살 것을 왕에게 권했다. 
하지만 타르퀴니아 왕은 면전에서 노파를 박대하고 쫓아내 버렸다. 
다음날 노파는 책 아홉 권 중 세 권을 불태운 후 나머지 여섯 권을 똑같은 가격에 팔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책인가 궁금했지만 이번에도 왕은 사지 않았다. 
노파는 다시 세 권을 불사르고 나머지 세 권만 들고 찾아와서는 여전히 아홉 권의 가격을 요구했다. 
그제서야 왕은 뭔가를 직감했고 서둘러 아홉 권의 가격으로 책을 샀다. 
이 노파가 바로 전설 속의 지혜와 신비의 대예언자 시빌이었고 그녀가 판 책은 로마의 앞날을 세세하게 기록한 예언서였다. 
로마인들은 시빌의 신탁서를 주피터 신전에 모셔놓고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만 열어 보면서 위기를 헤쳐 가는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 로마인들은 타르퀴니아왕의 무지 때문에 불타 없어져버린 여섯 권의 책을 두고두고 아쉽게 여겼다. 
하지만 남아 있는 책들을 소중히 여겨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마음이 이어져 로마 천년의 영광을 구가하는 기틀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앞날 예언한 시빌의 신탁서 
델피의 신탁이나 시빌의 신탁은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지만 미래예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인간이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미래를 엿보려고 하는 욕망을 이야기 속에 담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보는 능력은 원래 신의 영역이지만,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가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탁의 형태로 미래를 보여준다는 식이다. 
여하튼 미래예측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까지 미래예측은 신의 영역이었고 따라서 예언자, 점성술사, 주술사의 몫이었다. 
하지만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미래예측은 그 본질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근대사회의 태동과 함께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명확히 구분되게 된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불리는 세계사 상의 위대한 흐름은 인간이 비로소 세계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서 중세까지 미래예측은 신의 영역 
위키백과사전(ko.wikipedia.org)에 의하면 르네상스는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는 시기적으로는 1400년부터 1530년의 약 130년 동안인데, 과학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대와 이어주는 시기였다. 
인문학자나 역사가들은 문예부흥은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으로 해석한다. 
역사적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근대로의 이행은 신 중심의 역사에서 인간 중심의 역사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도래한 근대사회는 미래예측이란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이다. 
근대 이전의 역사는 신 중심의 역사였다. 

근대사회 도래는 의미있는 변화 
역사는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일 뿐이고 인간은 그 속에 던져진 숙명적 존재이자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문주의의 부흥, 과학기술의 진보 그리고 합리적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을 역사를 개척하는 능동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신의 섭리에 의지하던 인간은 이성과 과학의 발견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사회의 태동은 과학기술에 기반 한 인간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은 과학연구로 자연의 법칙을 밝혀내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또한 인간은 기술개발을 통해 온갖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면서 인간감각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가령 중세시대에 망원경이나 자동차, 항공기 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인간의 감각은 한계를 갖고 있어서 시계를 벗어나는 것은 볼 수 없고, 아주 먼 곳은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망원경을 발명함으로써 인간의 시계이상까지 볼 수 있게 되었고, 자동차와 항공기를 만들면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캐나다의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언은 인간이 발명한 ‘미디어(매체)는 인간 감각의 연장(prolongation)’이라고 정의했다. 

대부분 미래예측은 기술예측부터 시작 
가령 안경이나 망원경은 인간 시각의 연장이고, 전화나 무전기는 인간 청각의 연장, 옷은 촉각의 연장, 자동차는 인간 다리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발명품들은 과학기술발전의 산물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사회를 급속하게 변화시켰고 근본적으로 바뀌어놓았다. 
과학기술은 근대사회 태동과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었다. 
과학기술이 이렇게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된 것은 미래예측의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과학기술 발전의 추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예측은 객관성, 과학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래예측은 기술예측으로부터 시작된다. 
근대 이후 인간은 신의 영역보다는 현실적인 인간사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기술 및 산업이 변화시키는 미래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창의문화진흥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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