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기차에서 내려서면 훅 끼치는 아열대 기후의 무더위가 온 몸을 감싸는 도시.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기차가 멈춘 역에 발을 내디뎠을 때, 코 안이 쩍 하니 말라붙는 듯 건조한 도시. 불같이 성질 급하고 목소리 크고 고집 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그러나 의리 있고 뒤끝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가마솥처럼 생긴 도시, 경상북도 대구. 내 고향이다.

고향이란 태를 묻은 곳을 말함이겠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러나 고향을 떠난 나그네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길 위에서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부적처럼 가슴에 지니고 먼데 산을 볼 뿐이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면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역 주변에 도열해 있는 늘 푸른 소나무, ‘히말라야시다’(개잎 갈나무, 소나무 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이다. 히말라야가 원산지인 나무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천근성(얕은 뿌리) 수종인 히말라야시다는 바람이 불면 쓰러지기 일쑤여서 수종 교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발 동대구역로의 히말라야시다는 그대로 보존되기를 기도하곤 했다. 다행이 지금은 나무 옆으로 쇠로 만든 봉으로 받침대를 해 놓았다. 춤추는 히말라야시다. 바람이 있든 없든 내 눈에는 언제나 동대구역로의 가로수 히말라야시다는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대 때도 그랬고, 오십대인 지금도 그랬다.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이 나를 바래다주던 그 길에 히말라야시다가 있었고, 언제나 외면만 하던, 내가 짝사랑한 선배가 웬일로 군에 입대하기 전날 술을 억병으로 먹고 나를 불러낸 곳도 히말라야시다가 있는 언덕 아래였다. 

고향 대구에서 늘 만날 수 있는 히말라야시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내게 전화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 아무 말도 못하고 어둠이 들어찬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은 어둠의 바다 같았다. 불러내 놓고는 선배는 술이 취해 잔디에 들어 누워 잠이 들었다. 
그 때 우리 집은 동대구역 근처에 있는 파티마 병원 뒤쪽에 있었다. 그 길을 지나가면 아직도 동그마니 어둠의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나의 스무 살 때의 뒷모습이 보이고는 했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처녀 때의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허공으로 낚아채는, 메마르고 날선 바람이 이리저리 방향성 없이 몰아 부는 동성로 거리를 헤매던 스무 살 시절.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이 날 짝사랑하는 줄 꿈에도 생각 못하고, 군에 간 선배를 몰래 짝사랑하는 나는 그 바람 부는 동성로 거리를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과 돌아다녔다. 
어두컴컴한 고전다방에서 200원짜리 커피(다른 곳은 130원 했다) 하나 시켜놓고 해가 질 때까지 파묻혀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하고, 약령시장 뒷골목에 있는 파전 집에서 해물파전을 시켜 놓고 막걸리를 마시거나, 생맥주집에서 백오징어 채와 땅콩을 시켜 생맥주를 마시거나, 포장마차에서 닭 근위(닭똥집)를 시켜 소주를 마시고는 했다.
가끔, 지금은 뉴욕에 사는 나의 절친한 친구 Y와 Y를 짝사랑한 다른 대학 공대생 J가 합류하기도 했다. 
Y는 지금은 베트남에 사는 키 크고 잘생긴 남학생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군에 간 선배를 생각하고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은 나를 생각하고, 내 친구 Y는 키 크고 잘 생긴 남학생을 생각하고, 다른 대학 공대생 J는 Y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그러나 언제나 호기롭게 시작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술자리는 한잔 두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종당에는 나는 다 토하고, Y는 소주처럼 맑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과 J는 창백한 얼굴로 우리 둘을 지켜보았다. 

짝사랑 가슴앓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20대   
그렇게 가슴 아픈 짝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술을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아픔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이고, 사랑의 아픔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은 인생의 쓴맛을 보기 시작한다는 말일 것이다. J는 Y를 바래다주고,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은 나를 바래다주었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혹은 가끔 걷기도 했다. 그 긴긴 동대구역로를. 그럴 때마다 언제나 동대구역로에 도열해 있는 가로수, 늘 푸른 소나무 과의 히말라야시다는 춤을 추고 있었다. 허공에 양팔을 벌리고. 
어쩜 히말라야시다는 언제나 떠나가는 바람을 짝사랑했는지 모른다. 아픈 짝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술을 마시고 히말라야시다는 춤을 췄는지도. 아니면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바람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는지도….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도 흘러가고, 내가 짝사랑한 선배도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은 교사가 되었고, 교사 아내를 만나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아내가 지금 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들었다. 
내가 짝사랑한 선배는 아내가 자궁근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다 출혈이 멈추지 않아 사별을 했다는 풍문이 들렸다. 
나 또한 한 삶을 살아내느라 귀밑머리 희끗한 여인으로 변했다.
Y는 신랑이 폐암으로 죽자 아이들이 있는 뉴욕으로 가버렸고. 다른 대학 공대생 J의 소식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어느 하늘 아래 그도 인생의 이런저런 아픔과 기쁨을 겪으며, 늙은 잉어처럼 멋있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들 인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래되어 마모되고 닳아 서서히 우주의 부스러기로 돌아가고 있는데 옛날의 그 동대구역로의 히말라야시다는 여전히 푸르른 채 그저 바람에 오늘도 춤추고 있었다.
나처럼, 나를 짝사랑한 남학생도 가끔 동대구역로의 늘 푸른 히말라야시다를 보며 나를 생각하는지…. 내가 짝사랑한 그 선배도 가끔 히말라야시다를 보며 나를 떠올리는지…. 
아픈 기억이든 아름다운 기억이든 모든 추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강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두 번 다시 그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일 것이고,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깊이 몸을 숨기는 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막의 물처럼 사랑이 좀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헤어짐이 있어 아름답고, 삶은 죽음이 있어 아름다우며, 짝사랑은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아 아름다운 법이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
어느 초여름, 비원을 거닐다가 문득 돌아본 오솔길이 어쩜 그리 아름답든지. 그 순간 깨달았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모든 시간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아름다움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슬픔의 현을 건드려 눈물 흘리게 하고, 눈물을 흘리면 인간은 정화 작용으로 마음이 순하고 깨끗해진다. 모든 인간이 가끔 추억에 잠겨 마음이 순하고 깨끗하게 정화된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맛나는 곳이 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도시에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십년 후, 혹은 이십 년 후 아니 내가 이 별을 떠날 때까지도 내 고향 동대구역로에 도열해 있는 춤추는 히말라야시다를 볼 수 있다면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춤추는 히말라야시다를 볼 때마다 나는 스무 살 때의 추억에 잠길 것이고 늘 그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순하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로, 오래된 영혼으로 나이 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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