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종교가 아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에게 의지하는 타력 신앙이 보이는 것은 그렇게 의지하면서 닮아가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얼굴처럼 인자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부처님이 생전에 한 일들처럼 이타심, 보리심(보살과 같이 지혜를 구하고 중생을 구하는 마음), 동체대비심을 배우고 그 마음에 따라 맑고 밝은 청정한 일을 하라는 뜻이다. 

남한테 나쁜 짓 한 사람이 자신과 가족이 잘되라고 불상 앞에 앉아 기도한다면 그 소원이 이뤄질까? 
하심하라는 부처님 말씀을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스스로 큰스님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몇몇 승려에게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극락왕생조차도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근기(재능·능력·취향·성향·품성·안목의 의미가 적절)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뜻을 가지고 노력하면 언젠가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뛰어난 수행 가운데 하나가 참선이다. 참선은 남 탓이나 하면서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을 바라보는 수행법이다. 
자기 안을 들어다 보고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그 안에는 내가 모르고 내가 원하지도 않고 내가 들어와 있으라고 허락조차 하지 않은 나와 무관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것이 아니라 아니어야 한다. 
나인 것은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심지어 나쁜 짓까지 하며 살아와서 나이다. 
그게 나가 아니어야 하는 건 그것을 다른 더 나은 맑고 밝은 청정한 나로 바꾸거나 성장시켜야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화두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찾다가 죽는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화두를 잡다 죽으면 죽어서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윤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세 망념과 그로 인한 번뇌는 부처가 돼야만 해결된다. 
경전상의 부처님만 성공한 그것을 요즘은 많은 사람이 잘도 입에 달고 산다. 
잠자면서도 깨어 있었다는 오매일여(寤寐一如)를 하고 깨달음을 얻어 인가를 받았다는 등등 사실은 모두 혹세무민이다. 
꿈속에서 화두를 잡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예비수행의 작은 성취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가 깨달음이 아님은 그걸 떠드는 가짜들이 아직도 전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늘공부’ 시리즈의 저자 현일 박재봉은 불교적으로 진여에 해당하는 그런 마음이 있긴 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막상 거기 가보면 황홀하다거나 아름답거나 평안한 것이 아닌 그냥 심심하거나 별거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불교적으로 진여로 사는 사람은 인류사 전체에서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데 그만큼 어려운 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오매일여는 깨어있을 때와 깊이 잘 때가 하나로 일관돼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자지 않거나 자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다. 
이는 잠자든 깨어 있든 어떤 일상에서나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 있다. 
항상 같게 하는 그 무엇을 이해하면 그게 자기의 본래면목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나 진여라고 한다. 이건 자지도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항상 성성하면서 또 항상 어두운 그런 것이다. 
단지 잠이나 깨어 있을 때나 화두를 잡으라는 말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걸 알면 그런 잠이나 깨어 있는 것과 상관없는 삶이 된다. 
오매일여는 이걸 깨우쳐야 하고 잠자나 깨어 있으나 항상 나를 보는 앎이 바로 불성을 가진 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각성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각성하면 견성(깨달음) 이라고 한다. 불교도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몰록(별안간) 신선한 각성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장좌불와 해야 견성한다는 잘못된 각성을 추구하면서 그게 무슨 경지인양 인생을 허비하게 하는 것은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 
몇몇 승려들은 뭔가 깨우침이 있다면 교만하게도 물의를 일으킨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종교, 생명환경실천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깨우침을 얻어서 부처님과 같이 수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적지 않다. 
대자유를 얻은 광명정대한 부처님같이 되라고 했더니, 부처님 가르침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사회적인 상식으로 인해 형성된 모든 지식과 관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두를 타파하기 이전에 우리가 가진 상식과 고정관념들을 먼저 타파해야 한다. 
그다음 서양적인 이분법으로 재구성된 자신도 잘 모르는 지식과 학문을 버리고 우리 아니 내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고 또 자신의 내면에 깊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그 지식을 찾아내 스스로 학문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각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봐왔던 것들, 정말 주변의 모든 것을 언제부터 내 옆에 어떻게 와 있는지를 보고 고마움 등의 새로운 가치를 느끼며 부여하는 그런 신선하게 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각성이다. 
오직 정부나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만 요구하는 급변하는 경쟁사회에서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이 웰빙에 이어 힐링을 찾고 있다. 
전국에 수련단체가 범람하고 요가나 단전호흡만 강조하는 단체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서 수행도 안 된, 자신도 행복하지 못한 스님들이 어쭙잖게 힐링을 떠들면서 관련 시장을 달구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단체나 수업에 가도 대부분 수강생은 ‘어렵다’ ‘좀 편했다’ ‘돈이 아깝다’ ‘뭐했는지 모르겠다’가 대부분이다.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없기에 애초부터 각성에 대한 진정한 소통이 불가하므로 대화 자체가 없다. 
동양 유학의 공자의 ‘논어’, ‘맹자’와 서양 고전인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대화’ 역시 대화에 관한 책이다. 
대화라는 것은 말하는 주체, 상대, 그리고 상황이 있어서 알기를 원하는 개념이 대화 속에서 더욱 구체화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유명한 선사들도 그들의 스승과 제자와 불립문자라는 선불교 안에서도 문자로 대화하면서 물질로 된 의발이 아니라 빗물질의 ‘도’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대화법을 중시한 티베트불교의 칼리챠크라 즉 시륜금강(時輪金剛)에 해당하는 우리말 ‘제라울’에서 저자 현일 선생은 작중 화자인 ‘제라울’과 ‘진현우’를 통해 가장 심오한 철학체계를 가진 불교조차도 넘어서고 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 싶고 부처조차도 뛰어넘고 싶은 이들에게 각성의 참뜻과 의미를 잔잔하게 선물하고 있다. 
현일 박재봉은 1972년 태어나 영동군 양산면 근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서울로 왔다. 
중학교 2학년 때 소설 단을 읽고 도의 길을 걸었다. 
1998년 외삼촌과의 만남으로 수련이 급진전했다. 개인적으로 득도의 순간은 없었지만, 작은 결실이 생겨 왕성하게 블러그(http://gusdlfwp.blog.me/)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늘공부’ 1·2·3과 ‘땅인사람’ 1·2, ‘제라울’(가마오출판사 : www.gamao.co.k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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