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에게 경영수업 받아 스타일 비슷
몸집 불려 그룹으로 발전…대물림 분주

2세대는 창업주와 함께 보낸 경우가 많다. 창업주에게 직접 경영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기업가정신도 비슷한 편이다. 다만 경영 환경과 제도의 변화와 세계경제의 변동, 각종 대내외 경영 변수들, 그리고 창업주의 유고 이후 경영 스타일의 변화 등으로 기업가정신이 진화하게 된다. 

2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차세대로 경영권을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는 시기를 많이 맞고 있다는 것이다. 구자경 LG전자 명예회장의 경우 이미 일찌감치 3세대 구본무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 지난해 5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3년 6월, 전 계열사 사장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강도 높은 변화를 지시했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다.

이 회장은 1987년 12월1일 이병철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식에서 △삼성의 전통과 창업주의 유지 계승·발전 △90년대까지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 △인재 양성 △인화와 단결 △국가경제발전 기여 등을 밝혔다.
개인의 독선보다는 조직을 우선하고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이를 통해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거의 이어 받은 셈이다. 
또 첨단 기술 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 활성화로 국제화를 가속시켜 신기술개발과 신경영 기법 도입 또한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는 이건희 회장 시대의 변화상을 담은 기업가정신으로 해석된다. 
이 회장 취임 25주년 삼성전자는 여러 가지 통계 자료를 내 놨다. 
취임 당시 9조9000억원 수준이던 삼성그룹의 매출이 384조원으로 25년 전에 비해 39배 이상 늘어났다는 수치다. 
같은 기간 삼성의 수출도 25배나 크게 늘었다. 특히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이후로는 15배의 증가폭을 보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수출에서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7년 삼성그룹의 수출이 국내 총 수출에서 차지한 비중은 13% 남짓이었다. 현재 삼성그룹의 수출액은 1567억 달러로 국내 총 수출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28%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정신에는 ‘과감함’이 있다. 
1974년 이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함께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결과론적으로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대박’이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엄청난 무리수였다. 
자본, 기술, 시장 등 가장 필요한 3대 요소 중 하나도 제대로 갖추질 못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안 된다는 3불가론이 거세게 일었다. 반도체 미래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던 이 회장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반도체의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어받았다. 1994년 10월 삼성은 마침내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했다. 시장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경영의 중심을 양에서 질로 바꾸자는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의 서막이 올랐다. 1995년 8월 애니콜은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생전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왼쪽), 정몽준 의원(가운데)이 어느날 새벽 경복궁 돌담길을 걷고 있다.<사진출처=정몽준 의원 트위터>

과감한 투자로 세계 1위 시장 공략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2000년 9월 국내 최초의 자동차전문그룹으로 출범했다. 1998년 현대그룹은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생존해 있을 때다. 
정 명예회장은 통일 소 1001마리와 함께 민간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듬해인 1999년 현대그룹은 현대아산을 세워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전담하게 했다.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대차 그룹이 지난 15여년 동안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과 변화를 거듭했다. 
새로 쓴 현대차 역사의 중심에는 정 회장의 강력한 글로벌 리더십이 있다는 데 대해 재계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정 회장의 적극적인 품질경영, 과감하면서도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글로벌 무한경쟁 격랑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는 평가다.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선두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은 품질뿐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지난 15여년 동안 강력한 품질경영을 실시했다. 
그는 “품질은 생산자적 시각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소비자적 입장의 충분조건”이라고 역설하며 임직원들에게 품질혁신을 강조했다. “품질은 현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정 회장의 소신이다. 
정 회장은 품질조직 신설, 제도 도입 등 경영시스템 구축에 그치지 않고 일선에서 품질혁신 활동을 진두지휘했다. 국내외 품질관리 현장을 수시 방문하여 현장과의 소통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생산라인 근무자에게 다가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품질 개선방안을 직접 제시했다.
2005년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에서는 현대차가 비약적인 품질혁신을 이루고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현대차의 주된 성공 요인을 정 회장의 현장경영을 통한 품질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것이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정 회장의 품질경영은 현대차그룹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정 회장은 ‘국가의 브랜드 가치가 곧 기업의 브랜드 가치’라는 소신에 따라 세계적인 정상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현대자동차그룹의 발전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발전과 민간외교에도 공헌해 왔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인도 등 현대자동차그룹의 주요 글로벌 사업장이 위치한 세계 각국 정상 및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지속적인 회동을 통해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우호 증진 및 협력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전 세계 각국 지도자와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각국 산업협력현안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평가다.
북경현대는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외국에서 합작법인으로 설립한 국외 생산기지이다. 북경현대는 설립 2개월 만에 양산체제를 갖춰 양산 개시 1년 5개월 만인 2004년 5월에 생산대수 10만 대를 돌파했다. 이는 중국 내 자동차회사 중 최단 기간 달성 기록이다. 2008년 2월에는 최단기간 100만 대 생산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현대속도’라는 신조어가 중국의 생활어로 정착될 만큼 현대차는 쾌속 가도를 달리는 사업 추진을 통해 종합 자동차메이커로서 면모를 일신해 나갔다. 
자동차 본고장 미국 진출도 성공적이다. 앨라배마 공장은 연산 30만 대의 생산능력을 갖췄으며 ‘메이드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제품이 나오도록 철저한 현지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명차의 고장인 유럽도 기아차 슬로바키아공장을 앞세워 공략에 나섰다. 현대차 역시 체코공장을 지어 유럽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현지 전략차종이 병행·교차 생산되는 첫 번째 현지 공장으로 연간 생산능력 30만 대 규모의 자족형 완성차 공장으로 건설됐다.

MBC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녹화하고 있는 구자경 명예회장.꾸밈없는 소탈함이 오히려 매력이 됐다. (1997.11.21)

품질현장주의·글로벌기업으로 발전 
LG그룹 2세대 구자경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효(孝) 경영’이다. 
구인회 회장이 1970년대를 맞이하지 못한 채 60년대 마지막 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이듬해 초 럭키그룹은 2대 회장에 장남인 구자경을 앉혔다. 
당시 언론 등 주위에서는 구씨와 허씨 일가가 얽히고 6남 4녀라는 많은 자녀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차기 총수문제가 잡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당시 럭키는 화학, 전기, 전자, 정유, 전선, 무역, 언론 등 11개 기업군을 거느린 대기업이었다. 따라서 그룹을 이끌 총수 자리는 늘 세인의 관심사였다. 
그룹 내에는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 구평회, 구두회 등 형제들과 사돈가인 허준구, 허신구 등이 주요 요직에 포진해 있었지만 구 회장 승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효를 숭상하는 집안 가풍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금전적인 문제, 사회적 지위 등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집안이 아님을 대외적으로 확실히 보여준 사례다. 
구 회장의 남다른 기업가정신은 경영혁신을 통해 나타났다. 고객가치창조, 인간존중주의, 자율경영주의, 초우량기업주의, 노사화합주의 등 전문경영인의 자세로 기업경영의 틀을 맞춰나갔다. 구인회 회장 기업가정신에 현대적인 경영기법을 덧입혀 구자경 회장 고유의 경영철학을 만들어 간 것이다.   
구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자본주의적 고객만족경영을 앞세워 선대가 강조했던 “사람을 믿으면 모두 맡겨라”란 이념을 융합시켰다. 
구 씨 집안의 경영철학은 선대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배어 있다. 구 회장의 증조부는 대과에 급제해 출사한 만회공 구연호로 임금 앞에서 경서를 읽는 홍문관 시독과 춘추관 기독관을 지낸 벼슬아치다. 
조부는 춘강공 구재서로 연암이 사업을 위해 진주로 나갈 결심을 하자 춘강공에게 허락을 받아주고 2000원을 쥐어주며 “나는 너를 믿는다”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겉으로는 엄부였지만 속내는 장남을 지극히 아꼈고 신뢰했다. 그 때 춘강공이 한 “나는 너를 믿는다”는 LG의 사시가 됐고 구인회에서 구자경, 그리고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는 기업가정신의 요체가 됐다.     
구 회장은 고객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다. 심지어 ‘고객에게 미친 영감’이란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구 회장은 늘 “우리가 고객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고객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고객의 불편이나 궁금증을 즉시 해소해 주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는 기업이라는 조직의 운영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으며 이 조직은 바로 사람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라고 역설했다.  
구 회장이 LG를 이끈 25년간의 기업가정신은 △인간존중 경영 △자율경영 및 정도경영 △국제화 경영 △지혜의 경영 △자기혁신 경영 등으로 정리된다. 
1995년 2월 22일 구 회장은 3대 회장에 장남인 구본무 현 회장을 세웠다. 창업 과반세기(48년)를 기점으로 새로운 경영체계를 세운 것이다.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에서 제작한 DC-10기 2대 인수 후, 왼쪽에서 두 번째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다.

경영혁신으로 비약적 발전 이끌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과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총수일가 2세라기보다 전문경영인의 이미지가 크다. 
1974년 입사해 전산, 정비, 인사 등 항공사 경영 전반을 두루 섭렵한 그는 오너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배웠다. 그는 또 낚시에서 경영 철학을 배웠다. 고기 잡는 재미가 아닌 수면을 응시하면서 인내하는 자세를 통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키워나갔다.
조 회장은 자기관리가 매우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래서인지 적당주의나 구태의연한 업무처리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 논리와 명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제안일지라도 적극 지원하는 그다.    
조 회장은 외적으론 근엄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매우 소탈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 주위의 견해다. 
낚시를 좋아하게 된 천성도 소탈한 그의 성품 탓이라는 것이다. 소탈한 성격과 달리 업무는 매우 치밀해 보인다. 그가 매년 내놓는 신년사와 창립기념사를 분석하면 그룹이 이뤄야할 성과를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2009년 창립식에서는 “대한항공이 외적인 성장보다는 내실을 더욱 중시함으로써 어떠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회사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며 강한 회사론‘에 불을 지폈다. 
이듬해 신년에는 “리스크 매니지먼트(Risk Management)를 강화해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항공사로 자리 잡아야 한다”며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1년 신년사에서는 기술과 경영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에 차별화된 경쟁 역량이 없으면 산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2012년에는 창의적 기업문화 활성화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며 중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취약 지역에서 기회를 찾자고 독려했다. 조 회장은 신년사에서 밝힌 지역에 순차적으로 신규 노선을 개척함으로 실천경영을 하고 있다.     
2003년 2월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항공사’ 비전을 제시하고 안팎으로 변화와 혁신을 지속하고 글로벌 명품 항공사로서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특히 조 회장은 일찍부터 세계 항공업계가 동맹체로 재편되는 변화의 흐름을 간파하고 2000년 초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각 대륙을 대표하는 항공사와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하는 등 세계적인 항공사들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층 활발하게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조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설명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문화·스포츠경영이다. 대한항공 남자배구단 창단부터 대한탁구협회장,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스포츠와 국가를 위해 흔쾌히 내줬다. 그 결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3수만에 성공했고 국가를 그의 노고를 훈장으로 격려했다.
조 회장의 취미 중 하나는 사진 촬영이다. 출사와 기업경영을 접목시킨 ‘앵글경영론’이 탄생한 배경이다. 앵글을 바꾸면 새로운 작품이 나오듯이 조직의 변화란 작은 관점을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자기관리 엄격·다방면서 국익 실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태평양건설 해외 수주담당 이사와 사장을 거쳐 1980년 한국화약그룹 관리본부장으로 입성하면서 창업회장인 김종회 명예회장에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8월 김 명예회장 타계로 갑작스레 회장에 오른 김 회장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조직을 장악했다. 
1983년 그룹명을 한화로 바꾸고 제 2의 창업을 선포했다. 화약산업에서 무역, 금융, 건설, 태양광 등 신성장동력 사업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조치였다.
김 회장은 화약에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방위사업에 진출, 각종 탄약류부터 첨단 유도정밀무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사업품목 확대 및 R&D 투자를 지속해 왔다. 
또 자동차부품, 항공우주사업 등 기계항공사업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 환경변화에 앞서 미래를 개척해 왔다. 인천공장을 보은으로 이전해 최첨단 친환경 종합 화약공장을 건설,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창원공장을 구미공장으로 통합함으로써 정밀 기계 가공 및 첨단 전자 부품 핵심사업을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역부문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주요 도시에 현지 법인과 해외지사 등의 네트워크를 통해 주요산업 원자재부터 식량자원 및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자원개발, 해외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해외 직접 투자 등 사업영역 확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향후 기존사업의 경쟁력 강화, 인도, 중국, 러시아 지역 등 전략적 거점 중심의 글로벌 경영 인프라 확대, 지원개발 투자 활성화 및 신재생사업 등 유망사업 진출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석유사업 수직계열화를 위해 당시 수백억 대 적자로 허덕이던 한양화학 인수에서 김 회장의 강한 추진력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한양화학을 인수한 지 불과 1년만에 흑자전환 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사업가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는 김 회장이 한화그룹 조직을 일찌감치 장악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는 동시에 그의 기업가정신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됐다. 
한화의 도약기로 분류되는 1996년부터 2004년에 김 회장은 사활을 건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그룹의 주력인 한화에너지를 매각하고 한화종합화학 일부를 팔았다. 심혈을 기울여 확장하던 기계부분과 인천매립지 매각까지 나서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대한생명 인수 ‘실탄‘을 만들 수 있었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 성공과 대한생명 인수를 통해 그룹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삼성으로부터 삼성토탈과 석유화학사업을 비롯해 방산사업을 인수했다. 
이 인수로 한화그룹은 석유화학 분야에서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춰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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