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대까지 흐르면서 서서히 ‘변화’
사업보국서 신성장 동력, 국익에서 자생으로

기업가정신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뚜렷한 기업가정신이 사라졌다는 반증이다. 본지는 지령 100호 특집으로 대를 잇는 기업가정신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기업가정신 한 나라의 정신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축이다. 나라 경제를 굴리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창업세대에서 많게는 4세대까지 이어진 대를 잇는 기업가정신을 통해 경영철학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를 통해 차세대 리더들이 가져야 할 기업가정신이 어떤 것인지도 알아본다.

글 | 유성호·김지완 기자

 

1세대 기업가정신 찾기 활발

장기 저성장·청년 실업 시대 해법 
창업세대 ‘사업보국’ 강력한 리더십

60년 성상의 산업사회가 또 다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재계 곳곳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다름 아닌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에서 해법을 찾아 난국을 돌파하자는 움직임이다. 
더불어 이런 기업가정신을 후대에 물려주려는 재계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2011년 말 문을 연 ‘정주영창업캠퍼스’가 대표적인 가운데 글로벌네트워크가 강한 대우, 정몽구재단(구 해비치재단) 등에서도 청년창업 지원 등 젊은 리더 양성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창업세대의 기업가정신을 다시금 강조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지난 2011년 11월 29일 숭실대에 정주영창업캠퍼스가 문을 열었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숭실대에 1호로 세워진 정주영창업캠퍼스는 정 명예회장의 ‘청년불패’ 정신을 이어받아 청년 창업 지원을 위해 아산나눔재단이 기금을 출연해 만들었다.  
정주영창업캠퍼스는 재단의 가장 중점적인 사업으로 청년창업 인큐베이팅과 멘토링 등을 모토로 삼고 본교와 함께 기획하는 전략적 프로젝트다. 
숭실대는 지난 1996년부터 ‘정주영 창업론’ 강좌를 개설해 학생들에게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교육해 오고 있다.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의 창업가정신은 한마디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비록 정치적으로 그룹 해체를 당했지만 그의 기업가정신은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로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2010년 3월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43주년 기념 행사장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청년 실업자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당시 “요즘 청년실업자가 굉장히 많은데 정부가 모두 구제하기 힘들다”며 “우리가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자리 잡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고 약속했고 최근 실천적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대우맨’들의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소는 김 전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미취업 청년들의 해외 취업과 창업 지원을 위한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목적으로 ‘글로벌 영 비즈니스맨 포 베트남 양성과정’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다. 
대우세계경영硏과 베트남 국립다랏대학교, 현지 대우 협력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베트남은 김 전 회장의 애정이 남달랐던 나라다. 1980년대부터 위험국가로 분류된 지역임에도 대우는 이곳에 과감하게 투자를 진행했다. 그때 심은 ‘대우’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아직도 베트남에선 ‘최고’로 여겨지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베트남 현지 교육과정에 직접 특강에 나서는 등 멘토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자신의 기업가정신과 창업정신, 경영관, 리더십은 물론 대우의 성공과 실패사례를 알려 주고 있다.   
베트남 청년기업가 양성 프로젝트는 김 전 회장의 최측근인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전 대우 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베트남에서 ‘청년 김우중’, ‘제2의 김우중’을 키워내는 것이다. 장 회장은 김 전 회장이 남긴 대우맨의 정의를 “전 세계 어느 지역에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비즈니스맨”이라고 말했다.  
5000억원에 달하는 사재를 출연해 개인 기부금으로 국내 최고액을 기록한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도 재단을 통해 청년창업을 지원하고 나섰다. 
정몽구재단은 저소득층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농어촌 지역 초등학생 등 총 8만4000명의 교육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사업과 더불어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창업세대 기업가정신

이병철 회장 “나의 갈 길은 사업보국에 있다”
정주영 회장, 불굴의 정신으로 국가경제 이바지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 LG 구인회·허만정, SK 최종건·최종현,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등의 기업가정신 공통점은 ‘사업보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 국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 이들은 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이병철 회장은 사업에 투신한지 40년이 지난 1970년 중반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일으킨 사업이 40여 개가 넘지만 내로라 할 경영관을 정립했다고 자부하기엔 아직 미흡하다. 그러나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은 흔들림이 없다”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이 회장은 또 “기업인의 소명은 견실하게 기업을 운영해 확대 재생산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기업인이 기업을 부실하게 운영하면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가족, 거래처, 은행, 주주 등에게 연쇄적으로 피해를 주고 결국은 세금을 못 내고 수출도 막혀버리면 국민경제에 손실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기업인은 기업을 잘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 회장이 중요시 여긴 또 하나의 경영관은 ‘기업이 곧 사람’이란 인재제일주의 정신이다. 
이 회장은 사람을 쓸 때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 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用人)철학에 충실했다. 회사란 단순히 상품만 생산하고 판매해 이윤만을 남기는 조직체는 아니라 사람이 전부인 조직이란 게 이 회장의 철학이었다. 이 회장은 유능한 기업인은 인재를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격과 영도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1957년 공개채용제도를 도입했고 삼성인력개발원을 지어 직원들의 체계적인 교육을 지원했다. 직원 채용면접 시 관상전문가를 옆에 뒀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이 회장은 외모와 인품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이는 까다롭게 뽑아서 믿고 맡긴다는 이 회장의 인재중심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회장은 ‘용병의 달인’, ‘인사 관리의 귀재’로 불린다. 그는 수시로 “나는 기업경영의 80%를 인재양성에 쏟았고 인력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고 강조했다. 
또 “인재제일은 나의 신조이며 인사 정책은 언제나 삼성의 경영정책 중에서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공언해 왔다. 그의 어록 역시 상상 부분이 인재의 중요성과 용인철학을 담고 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인재관은 후일 실력본위, 능력위주, 신상필벌이라는 삼성의 인사원칙으로 자리 잡는다.      

인재 제일주의도 공통분모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기업가에서 정치가로, 소 떼로 남북을 이은 민간 외교관 등 그가 일군 삶은 그의 불굴의 기업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정 회장의 창업 초창기 시절은 한마디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식민지 시대 정치적 불안이 기업 경영을 어렵게 했다. 
전시체제령, 강제합병, 화재 등으로 아산은 여러 차례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러나 그는 늘 새롭게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시련은 있을 지언 정 실패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어록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란 자서전 제목이 됐다. 
정 회장의 실패불가론은 애국심과 맞닿아 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 건설 계약서명식 때 그는 “우리 어깨 위에 민족의 생사가 달려있고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아예 대담한 ‘실패불가’ 정신으로 일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 회장의 이런 담대함과 담담함은 “창업의 가장 근본은 낙관적인 사고와 자신감”이란 표현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사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현대그룹은 싸전에서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공업소를 하다가 주위 반대에도 무릅쓰고 토건업에 뛰어든 ‘자신감’이 있었다. 
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란 긍정의 힘을 믿었다. 결국 자동차공업소와 토건업을 합친 현대건설은 오늘의 ‘범 현대가’를 만든 대동맥이 됐다.
정 회장의 개척가적 기질을 담은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청년창업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전파하는 전초기지인 ‘아산나눔재단’ 역시 이 어록을 강조하고 있다. 아산의 창업정신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에 성공한 이후 철 구조물 재킷 하나에 1억 달러가 넘고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가져가지 않으면 공기단축을 포함해 수익을 낼 수 없다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자 급기야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정주영 결단’을 만들어낸 것도 건설사에 남아 있는 놀라운 도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주베일 항만공사를 위해 높이 375m, 무게 4만t의 해양구조물을 바지선에 싣고 걸프만으로 떠나는 광경

혼돈의 시기 창업 국가 산업발전 한몫
구인회 LG그룹 명예회장은 해방 직후의 혼란한 경제상황 속에서 기업을 창업해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했다. 구 회장에게 붙은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의 상업계 족적을 대변한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로 플라스틱 산업을 개척하고 석유화학산업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가 자동차, 삼성이 반도체를 개발할 때 구 회장은 라디오, TV, 냉장고 등 생활밀접형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등 전자산업을 개척하는 한편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최초로 민간정유회사를 설립해 에너지산업을 발전시킨 한편 국가에너지의 안정적 확보에 기여한 공로도 크다. 

국내 최초 국산 전화기로 시험 통화하는 구인회 회장(가운데)

1948년 설립한 럭키화장품연구소 역시 국내 최초 민간기업연구소에 이름을 올렸다. 럭키치약을 개발해 콜게이트치약을 시장에서 몰아 낸 것도 최초란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1960년대에는 국내 최초로 비닐하우스용 PE필름을 개발해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이는 등 영농과학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구 회장의 사업전개 방식은 민첩함에 있다. 빨리 판단하고 실행하는 장점이 오늘의 LG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토지를 팔아 산업자본화한 후 유통과 생산 부분에 뛰어든 상황을 살피면 빠른 판단력과 실행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업전개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를 따라 붙게 했다. 
최초를 좋아한 그는 전형적인 ‘새벽형 인간’이었다. 그는 날이 밝지도 않은 새벽에 맨 먼저 일어나 종업원들이 그날 작업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빈틈없이 준비를 했다. 사무실과 작업장을 말끔히 청소하고 각종 원료를 챙겼다. 심지어 쓰레기를 치우고 건물 앞 큰길까지 쓸고 물을 뿌렸다. 
부산 범일동 공장 시절 장남 구자경 상무는 이러한 아버지 아래서 혹독한 경영교육을 받았고 오늘날의 거대 LG를 일군 2세대로 존경받고 있다. 
구 회장은 패션 감각이 뛰어났지만 평소 소탈한 옷차림을 즐겨했다. 부산 서대신동 락희화학 시절에는 미군 장교들이 입는 군복 상의로 만든 파카코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바깥 나들이할 때 말고는 늘 파카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구 회장하면 그 옷을 함께 떠올렸다.  
구 회장은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라 하지만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복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사회공헌을 일찌감치 주장했다. 구 회장은 “사회공헌을 통해 나라의 백년대계에 보탬이 돼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을 일으킴과 동시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구 회장은 또 “국민 각자가 모두 자기 본분을 알아서 학생들은 학원에서 진리 탐구에 매진하고, 기업인은 나라의 산업을 일으켜 세운다는 어떤 사명감으로 열심히 뛰고, 정치가는 당리당략이나 사욕에서 벗어나 진실로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자세로 나간다면, 나라가 잘못되려 해도 잘못될 수가 없을 것이다. 길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보지 못하거나, 보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며 기업가정신을 강조했다.  
특히 “기업이란 어느 특정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 사회 인류가 다 같이 그 혜택을 누리는 재산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며 기업의 공개념화를 강조했다. 

최종건 회장(왼쪽)이 1969년 1월 수원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찾아 시설 점검을 하고 있다.

“기업은 나라의 백년대계에 보탬 돼야”
SK그룹의 창업주는 최종건 명예회장이다. 최 회장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을 창립했다. 
최 회장은 광복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적산(敵産) 선경직물을 인수해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으로 일구는 초석을 만들었다.
최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사업보국, 개척자 정신, 그리고 열정과 신념으로 집약된다. 담연을 흔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기업가’라고 부른다.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최고의 섬유공장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원사생산에 이르기까지 수직 섬유생산체제를 갖췄기 때문이다. 
우리 섬유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반드시 원사생산을 해야 한다는 신념과 이를 추진한 개척가적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결정의 순간에서 최 회장의 개척가적 정신은 빛을 발했다. 맨손으로 직물공장을 일으켜 세우고 수입에 의존하던 원사의 국내생산 등은 도전정신과 개척자 정신의 발로였다. 
‘하면 된다’는 기업가정신은 많은 창업주들의 특징이다. 최 회장 역시 이러한 강력한 열정과 신념의 소유자였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최 회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투자를 계획하고 추진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무리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이같은 뚝심은 이병철, 정주영 회장에게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창업주의 기업가정신 바이러스인 셈이다.
최 회장 평전에 따르면 “나는 전쟁 직후 잿더미가 된 선경을 일으켜 세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우리 선경은 이제 겨우 단단한 반석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기업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재도약의 시기인 것입니다. 올해부터 나는 선경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재도약의 첫발을 내딛으려고 합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반드시 성공적으로 완수할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들도 각오를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적고 있다. 사업에 대한 열정과 기업가정신이 물씬 느껴지는 대목이다.   
최 회장은 기업을 통한 고용창출로 사업보국을 한다는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생활 기반인 일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발전과 국력증진에 기여하는 것이 기업인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창업과 기업경영을 통해 ‘애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수입제품을 국산화하고 이를 다시 수출하는 것이야말로 사업보국이란 것이다. 
최 회장은 종종 직원들에게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최 회장의 담담한 사업보국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동일인 기준 재계 3위 그룹으로 성장한 것은 최 회장이 만든 초석위에 동생인 최종현 회장의 세밀한 관리능력과 국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형을 닮아 개척가 정신과  추진력 또한 남달랐다. 최 회장은 선경경영혁신운동을 할 때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연설문의 요지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강조하라고 지시했다. 
최 회장은 “내셔널리즘은 ‘한 나라에 하나의 시장’, 리저널리즘은 ‘한 지역에 하나의 시장’,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라며 “세계 경제의 단계별로 기업 활동이 달라져야 한다”고 세계화를 강조했다. 
최 회장은 또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이다. 이와 같은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무한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당연히 기업 스스로가 전력투구해야 함은 물론”이라며 “세계화는 위협 요인이자 기회 요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개척가적 정신과 통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건 회장은 1962년 동생 최종현을 부사장에 임명해 경영에 참여시켰다. 최종현은 당시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배우던 중에 부친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귀국한 상태였다. 선경의 역사는 최종현 명예회장 이전과 이후로 1, 2, 3기가 나뉜다. 
1기는 창업기, 2기는 도약기로 최 회장이 형의 사업에 합류해 살림을 안살림을 맡고 형은 대외업무를 맡아 선경을 그룹규모로 성장시킨 때를 말한다. 3기는 1973년 최 회장 타계 후 최종현 주도로 그룹을 성장시킨 시기다. 최종현은 부사장 취임 직후 내수 위주 생산 체제를 수출 생산체제로 전환하고 설비증설에 박차를 가한다. 
이 때문에 형은 무역에 전념할 수 있어서 직물을 동남아에 수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형의 갑작스런 타계로 그룹을 이어 받은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란 꿈을 향해 한 걸음 씩 전진했다.
석유파동 가운데서도 최 회장은 1974년 전년 대비 71% 늘어난 8600만불 어치 원사를 수출했다. 동시에 석유화학업 진출을 위해 중동 산유국과 경제외교를 펼친 결과 민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원유를 직적 수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수직계열화 기초를 쌓았다.

경북 포항 영일만에 포항제철을 설립할 당시 박태준 회장(지휘봉 든 사람)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개척자 정신·열정과 신념’ DNA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2008년 “진정한 기업가정신은 기생(寄生)을 거부하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경제 위기 극복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기업가 정신의 재무장을 주문한 것이다. 
박 회장은 당시 경제5단체가 주최한 ‘기업가정신 국제 컨퍼런스’에서 포스코 윤석만 사장이 대독한 기조연설을 통해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면서 “기업성과는 ‘공(公)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미래투자와 공익사업으로 나갈 수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박 회장은 또 “창업세대의 기업가정신은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고 창조하겠다는 사명의식과 도전정신 그리고 뜨거운 열정이었다”며 “현재 기업가들도 이 같은 기업가정신으로 재무장해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당부도 곁들였다.
친기업 정서에 대해 박 회장은 정치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 얻어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친기업 정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 보다 진정한 기업가정신의 발휘 즉, 질 좋은 상품생산과 지속적인 경영성과, 기업이윤의 재투자와 사회환원을 통해 국민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이 최상”이라고 했다.
진정한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는 “‘천하(天下)는 공(公)’이라는 가치관이 필요하다”며 “경영을 충실하게 하는 데는 ‘나의 것’이라는 의식이 도움이 되겠지만 거기서 나온 성과는 ‘공(公)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미래투자와 공익사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박 회장이 줄곧 주창한 “기업은 사회정의 실현과 영리추구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맞닿아 있다. 
박 회장은 살아생전 “오늘의 포스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업가정신이 시련을 넘어 성공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된 동시에, 기업문화로 승화되고 기업의 DNA로 계승됐기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박 회장의 리더십 요체는 ‘철저한 완벽주의를 기초로 탁월한 통찰력, 신속한 판단력, 강력한 추진력을 조화시킨 역동성’으로 요약된다.  
그의 이같은 리더십은 애국적 사명감과 조화를 이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켰다. 
군인 신분에서 처음 경영인으로 변신한 것은 1964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되면서 부터다. 박 회장은 사장 취임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꿨다. 이를 눈여겨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에게 종합제철소 건설 특명을 내리게 된다. 
포스코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자본은 물론 기술, 경험, 자원 등 철강업 육성을 위한 어느 하나의 조건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양질의 철강재를 생산해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의지 하나로 매진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사장이던 박 회장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포스코 내외부의 도전을 소화하고, 제철보국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박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들은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동해바다로 ‘우향우’해서 몸을 던져 죽을 각오까지 했다. 여기서 유래한 게 ‘우향우 정신’이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으로 살았던 박 회장은 빈곤과 부패에도 당당히 저항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면서 청탁을 과감히 거절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그 2배가 넘는 철강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열정 때문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은 1987년 당시 “지금까지 22년 세월동안 박 회장과 나는 사업보국이라는 길을 함께 걷는 길벗이었다.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서슴없이 ‘철’이라고 대답한다”며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이자 경영에 관한한 불패의 명장이다. 우리의 풍토에서 박 회장이야말로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재로서 귀한 존재이다”고 말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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