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한지화가 함섭

덧붙이고 두드릴수록 오방색 한지 위로 돋아나는 韓國의 美

글 | 유성호 기자 · 사진 | 이정환

‘미술계의 서봉수’ 
함섭 화백을 말할 때 가끔 비교되는 인물이 바둑 고수 서봉수 9단이다. 서 9단은 당대를 풍미했던 조훈현, 조치훈 9단과 달리 중국이나 일본 유학 없이 순수하게 국내서만 배운 바둑 고수다. 그래서 흔히들 서 9단을 국내파라고 하는데, 함 화백 역시 국내파 거장이다. 
함 화백과 서 9단은 또 배문고등학교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함 화백이 1969년 9월 미술교사로 배문고에 발령을 갔는데, 서 9단은 이미 졸업하고 없었지만 그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인해 호사가들은 국내파 거장 두 사람의 역사를 교차시키곤 하는 것이다. 
함 화백은 1942년 생으로 홍익대 미대와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나와 배문고와 서문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술계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으며 특히 강원도에서는 ‘보물급’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에는 오랫동안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화 작업을 해오다가 1980년 초부터 과거 속에서 자신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표현 매재(媒材)로 삼은 것이 닥종이, 즉 한지다. 함 화백의 말을 빌리자면 ‘한지가 곧 물감’이다. 

한지물감·천연재료 조화 동양미 발산 
아주 억센 닥나무 껍질부터 부드러운 한지, 그리고 다양한 재료들을 캔버스 위에서 연결시키는 접착제까지 모두 천연에서 나는 재료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 불멸성을 갖는다. 
언뜻 보면 유화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스크래치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닥종이 껍질과 한지를 켜켜이 쌓아서 만든 작품이다. 거기에 전주 고서점에서 평생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고서적 사들여 작품에 사용하고 있다. 
먼 과거와 현대에 만들어진 한지는 캔버스 위에 때론 찢어지고 뭉개져서 겹쳐진다. 재료가 층을 이루고 누우면 시간이 화석처럼 쌓이고 오방색 형형색색의 한지가 더해지면서 마치 들숨, 날숨을 쉬면서 그림이 말을 거는 듯하다. 이는 미술평론가들이 찾아낸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평가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작품세계 기저에 한국적인 미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 화백 역시 ‘한지 물감’을 이용하고 빗자루를 붓 삼아 펼치는 일종의 콜라주 작품으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적 요소가 담겨있다는 면에서 백남준의 작품 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금병산 초입에 위치한 그림같은 아틀리에 
함 화백의 아틀리에를 찾은 지난해 12월 초, 춘천행 전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운 좋게도 겨울 정취의 백미인 눈발을 만났다. 역에서 주변을 구경하며 금병산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 오르니 한지화가의 야트막한 집채가 보인다. 길 이름이 풍류1길이다. 
약 3300㎡(1000평)을 사서 500㎡(150여평)을 화실, 안채, 수장고로 꾸몄다. 전에는 부인도 함께 살았지만 운전을 못하는 통에 시장보기 편한 춘천 시내에 가정집을 얻었고 이곳은 아틀리에와 수장고로만 쓰고 있다. 최근에는 미대를 나온 며느리의 작업실까지 꾸며 대를 잇는 공간이 됐다. 
아틀리에는 故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가 설계했다. 박수근 미술관, 노근리 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을 설계한 주인공이다. 함 화백이 박수근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일을 하면서 만났다. 이 교수 역시 해외 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 근대 건축의 거목 김수근 공간 대표 아래서 배운 역량있는 건축가다. 
한 번의 설계변경을 거쳐 지금의 아틀리에를 지은 함 화백은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특히 이중벽으로 지은 수장고는 완벽한 제습과 방진 설계로 작품을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는데 안성맞춤이다. 
함 화백의 작품이 유화나 아크릴물감이 아니고 천연재료이기 때문에 습기와 곰팡이 등에 약하다. 이 부분을 고려해 자동 습도조절이 가능하고 결로가 생기지 않도록 사방 수십 평을 버리면서까지 이중격벽을 만든 것이다. 그 덕에 수장고 안 작품들은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관돼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은은하지만 청명한 약재 냄새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궁과 용뇌 냄새다. 이들 향은 정신을 맑고 상쾌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함 화백의 안광이 맑고 형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실 사방에 그림이 걸려있고 공간 곳곳에 작품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그만큼 작품 활동이 활발하단 증거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한지 베이스 위에 오방색과 활자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이미지가 특징이다. 그러다가 이내 자연과 우주의 질감으로 방문자를 인도했다. 용뇌 향이 주는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고수(高手)의 세계가 낯선 방문자를 압도한다. 작품이 주는 압도적인 힘은 아트 페어와 전시회에서의 판매와 상관관계가 있다. 

(상단 시계방향으로)함섭 화백의 작업실에서 만날 수 있는 한지. 대부분 원주 한지다. 작업실 사방이 그림 지천이다. 수장고에 빼곡하게 차 있는 작품들. 함 화백은 북을 치며 건강과 기분 전환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고 한다.

해외 아트페어서 잇따라 ‘솔드 아웃’ 
함 화백은 대략 1500여 작품이 해외로 팔려 나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럽 500여점, 북미 500여점, 아시아지역 500여점이다. 1993년 4월에 미국 뉴욕 제이콥 제비츠 센터에서 열린 ‘뉴욕 아트 엑스포’에서 6점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계적 반열에 올랐다. 이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일본 등지에서 열린 아트 페어에서 수 차례 ‘솔드 아웃’(판매매진)을 기록하면서 ‘한국의 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다. 
솔드 아웃이 몇 차례 이어지면서 함 화백의 작품 값은 명성에 걸맞게 올라갔다. 함 화백은 주로 100~200호 짜리 대형작품을 만들어 낸다. 
200호짜리 한 작품이 1억원 정도에 팔려 나가고 있으니 호당 50만원인 셈이다. 
서울 시내 건물에만도 대략 6~70여 곳에 그의 작품이 로비나 최고 경영진 집무실 벽을 수놓고 있다. 
서울지검 신청사에 200호짜리가 두 작품이나 걸렸고 한솔문화재단 같은 대기업 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같은 미술관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한지를 이용한 독특한 작품세계 각광 
물에 적신 색한지와 고서 조각들을 정성스레 색칠 하듯 한 점씩 찢고 뜯고 오려서 붙인 후 구둣솔보다 더 큰 솔로 재료들을 두드려 융합시킨다. 종이라는 재질은 원초적인 닥나무로 남고 먹으로 된 활자 역시 화선지에서 분리돼 독립적으로 캔버스에 내려앉는다. 
영겁을 나타내는 거칠고 투박한 요철(凹凸)에 어떻게 붓글씨가 깔끔하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자리를 잡았는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여기에 동양 미의 정수인 오방색 색지들이 서로 조화롭게 자리 잡으면서 외국인들의 정서를 편안한 동양철학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그의 작품이 주는 힘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페인에서 아트페어를 자주 열었던 함 화백의 작품을 유심히 지켜보던 마르쉐 재단 이사장이 하루는 작품을 구매하자 1시간 후에 딸과 사위가, 그리고 이후 30분 만에 그들의 친구가 와서 ‘솔드 아웃’을 시킨 사건도 있다. 
최근에는 다국적 제약사인 독일 베링거잉겔하임의 문화재단에서 그의 작품을 구매했다. 
작품에 안목이 있는 한국인 컬렉터를 앞세워 컬렉션을 한 것이다. 이는 곧 미래가치에 대한 투자란 의미에서 함 화백의 작품성이 외국인들에게 선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큰 사건이 있었다. 얼마 전 세계 최대 부호집안인 미 록펠러 가문의 데이비드 록펠러의 증손자인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 부부가 한국에 와서 함 화백을 만났다. 지난해 4월 미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함 화백 작품을 구매한 인연이 있다. 
록펠러 가문은 어떤 가문이던가. 2007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색면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센터(White Center)’가 당시 환율로 약 670억 원인 7280만 달러에 팔려 2차대전 이후 현대미술 부문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그림 값도 값이지만 작품 위탁자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더 큰 화제가 됐다. 
이 그림을 내놓은 사람은 바로 체이스 맨해튼 은행(현 JP모건 체이스 앤 컴퍼니)의 회장인 데이비드 록펠러였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0년에 이 그림을 약 1만 달러 정도에 샀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차익을 실현한 콜렉터다. 
이처럼 록펠러 집안은 대표적인 미술 컬렉터 집안이다. 
뉴욕의 세계적인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를 세우고 이끌어가는 집안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림을 배경으로 록펠러 가문의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 그의 부인 수잔 록펠러와 함께한 함섭 화백.

해외 콜렉터들 작품 선호 가치 급등 
함 화백은 이 같은 인연을 통해 한가지 목표가 생겼다. 바로 ‘모마’(MoMA)에서 개인전을 열어 보는 것이다. 모마는 ‘The Museum of Modern Art’의 준말로 뉴욕현대미술관을 말한다. 1929년 존 록펠러 주니어 부인(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 조모) 등 3명의 여성이 중심이 돼 인상파 이후 유럽 미술을 소개하자는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영화, 사진, 건축, 디자인을 미술의 중요한 영역으로 동등하게 설정한 최초의 미술관으로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 등과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올해 이들 부부가 춘천으로 다시 온다고 하니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갈 것으로 기대된다. 
모마 개인전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 꿈꿔보는 가슴 설렌 일이다. 

“‘모마’에서 개인전 여는 게 소원” 
“앞으로 10년만 더 작업하게 해 달라고? 어림없는 소리지. 90살까지는 열심히 할거야. 옛날엔 단명작가가 유명하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야. 오래 작품 활동하면서 더 멋진 곳에서 전시도 하고 그래야지” 
함 화백은 모마 개인전에 대한 솔직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해외에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린 기여로 2013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같은해 한국미술협회서 주는 대한민국 미술인상 본상을 수상했고 2012년엔 동부그룹의 동곡문화재단이 주는 동곡상 일곱 번째 주인공이 됐다. 
1950년 19세 때 보스톤마라톤 1위를 차지해 국위를 선양한 함기용 선생이 그의 작은 아버지다.

저작권자 © 타이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