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경제발전·남북교류 기틀 다진 거목
 無에서 有 창조한 기업가정신의 표상

지난달 25일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한국 경제 발전과 남북 교류의 기틀을 다진 거목으로 평가된다. 정 전 명예회장은 흔히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기업가’로 부른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라는 그의 적극적인 기업가정신 때문이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 전 명예회장은 16세에 소판 돈 70원을 갖고 상경해 지금의 현대그룹을 일군 그의 기업가정신과 업적을 다시금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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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탄생과 발전

위기 때마다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극복
싸전에서 토건․자동차업 전환 비약적 발전 이뤄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에게 물려받은 근검·성실함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생활철학과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식도 남달랐다. 정 회장의 인생이 파란만장한 만큼 현대그룹도 다이내믹하게 변모를 하면서 성장했다. 지금은 계열이 여럿으로 분리돼 독자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정 회장의 숨결이 남아 있는 적자는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은 지금은 자동차지만 건설업을 모체로 성장했다.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현대차그룹이 발아했다. 그 전에 씨를 뿌린 것은 싸전이었다. 22세 때인 1937년 초 서울 신당동에 있는 복흥상회를 물려받은 것이 기업(起業)의 기원이 됐다. 
정 회장이 4년 전 싸전 배달원으로 취직해 이를 악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결과다. 
정 회장은 1938년 1월 신당동에 세 를 얻어 상호를 ‘경일상회’로 바꾸고 자신의 싸전을 열었다. 삼성을 일으킨 고 이병철이 첫 사업을 실패하고 대구에 삼성상회를 만든 것과 같은 해다. 
정 회장은 현대건설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기업 경영에 나선 이후 몇 차례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1937년 중국과 일본 간 노구교사건이 터지면서 정 회장에게 첫 시련이자 위기가 닥쳤다. 중국과 전운이 감돌자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과 함께 미곡통제와 쌀 배급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싸전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전국 싸전들은 일제히 문을 닫았고 1939년 말 경일상회 역시 폐업을 했다. 이병철의 삼성상회가 중일전쟁으로 인해 호황을 누린 것과 정반대였다. 
정 회장은 또 건설업 사업 초기 고령교 복구공사(1953년)에서는 파산 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 
1953년 정부는 6·25 당시 파괴된 고령고를 복구하기로 했다. 당시 정 회장은 장비부족으로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폭등하는 물가 탓에 인건비와 자재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사를 시작할 때 40환이던 쌀 한가마 값이 4000환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정 회장은 막대한 손실로 집을 처분해야 했지만 결국 계약기간 안에 공사를 마쳤다. 신용을 지킨 셈이다. 
정 회장의 도전정신을 옆에서 지켜본 이가 있다. 바로 故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다. 
포항제철 제1기 공사 마무리가 한창이던 1972년의 어느 날 정 회장은 공사현장을 보겠다며 불시에 들이닥쳤다. 
박 회장이 직접 공사현장을 안내했고 정 회장은 현대가 직접 건설하던 제1고로와 당시 시운전 중이던 제1후판 공장을 보자고 했다. 
한참 동안 현장을 소상히 살핀 정 회장은 “됐소!”라고 말한 후 이번엔 부두를 보여달라고 했다. 
말없이 부두공사 현장을 살펴보던 정 회장은 “언제 술이나 한잔 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떠났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 정 회장은 울산에다 대규모 조선소 건설을 시작했다. 그제서야 조선소 건설의 전제가 되는 중후판(重厚板) 생산이 제대로 될 것인지, 또 그 제품을 포항에서 울산까지 해상수송 할 수 있겠는지를 살피러 온 것이다. 박 회장은 이를 두고 “정확한 판단력과 철저한 현장확인, 그리고 전광석화 같은 결단력이 돋보였다”고 회고했다. 
그 후 자동차 공장의 건설을 결단하는 과정 역시 이와 유사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두 공장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연보 
1915.11.25~ 1930’s 
1915 .11. 25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생 
1930. 03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1934 미곡상 부흥상회 취업 
1938. 01 미곡상 경일상회 개업 
1939. 01 변중석 여사와 결혼 
1940’s 
1940. 03자동차 수리 공장, 합자회사 아도서비스 설립 
1946. 04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 05 현대토건사 설립 
1950’s 
1950. 01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 
1950. 03 현대상운주식회사 설립 
1953. 04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착공 (1955년 5월 완공) 
1957. 09 전후 최대 단일공사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수주 
1960’s 
1962. 07단양시멘트 공장 착공 
1965. 09 국내 최초의 해외 건설 공사 진출, 태국 고속도로 건설 공사 수주 
1967. 04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공사 착수 (1973년 12월 완공) 
1967. 12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1968. 02 경부고속도로 착공 
1969. 01 한국지역사회학교후원회 회장 취임 
1970’s 
1970. 01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1970. 10 고리원자력 1호기 착공 
1971. 02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1. 06 금강개발주식회사 설립 
1972. 03 현대울산조선소 기공 
1973. 12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1974. 02 현대엔지니어링주식회사 설립, 현대자동차서비스주식회사 설립 
1975. 04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6. 02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 
1976. 03 아세아상선주식회사 (현대상선주식회사의 전신) 설립 
1976. 12 현대종합상사주식회사 설립 
1977. 02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1987년까지 5선 연임),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취임 
1977. 07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 이사장 취임, 현대정공주식회사 설립 
1978. 08 서산 천수만 간척 사업 착수 
1980’s 
1981. 05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취임 
1982. 07 대한체육회 회장 취임 
1983. 02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설립 
1983. 09 동방화재해상보험 인수(현대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 전신) 
1984. 02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 (유조선 공법 시도) 
1986. 11 현대산업개발주식회사 설립 
1987. 02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 취임 
1987. 09 세종연구소 이사장 취임 
1989. 07 한·소 경제협회 회장 취임 
1990’s 
1992. 01통일국민당 창당 
1992. 03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당선 
1992. 12 대통령선거 출마 
1998. 06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방북 
1998. 10 통일소 501마리와 함께 방북, 김정일 위원장 면담 
1998. 12 기아자동차주식회사 인수 
1999. 02 현대아산주식회사 설립 
2000‘s 
2001. 03. 21소천 

즉각적인 실행으로 비용 절감 
현대그룹은 1947년 5월25일 중구 초동에 ‘현대토건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첫 출발 당시 직원은 기능공 10여명 정도였다. 사무실도 한 해 전에 설립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의 한편을 이용하는 초라한 살림살이였다. 
정 회장은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자본금은 3000만원, 종업원은 25명에 불과한 소규모 영세 건설업체였다. 현대건설은 미군공사와 전후복구공사를 수행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업 순위 1위에 오른 것은 이로부터 창립 10년만인 1960년이다. 
자본금 1억원, 종업원 125명의 종합건설회사로 부상했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차기간이 끝난 1966년 현대의 자산은 28억8800만원, 매출액은 40억5770만원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 개발과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사업들이 활발히 시작됐다.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국가 기간시설의 건설이었다. 
이미 남보다 앞선 기술력으로 한강 인도교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현대 건설에게 기회가 왔다. 현대건설은 호남 비료 공장을 시작으로 한국비료, 충주 비료 공장을 건설했으며 삼척․영월․군산․인천․평택의 화력발전소를 지으며 기술력을 쌓아갔다. 
화력발전소의 성공적인 시공은 수력 발전소인 춘천댐과 다목적댐인 소양강 댐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 부족한 시멘트와 철근을 대체하기 위해 콘크리트댐이 아닌, 자갈과 모래를 이용한 사력(砂礫) 댐을 고안해 소양강 댐을 완성시킨 아산의 창조적 사고는 우리나라 대안 건설의 효시로 손꼽힌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대역사로 공사 기간은 당초 3년이었다. 당시 기술 수준과 장비로 이 기간 내 42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모험이고 불가능 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산은 이때 기계화를 통한 공기 단축이 성공의 열쇠라고 판단하고 당시 국내 경제 상황에서는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800만 달러어치 중장비를 도입했다. 
1970년 7월 7일, 428km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지 2년 5개월 만에 개통된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로 회자되고 있다. 

경부고속道 착공 2년 반만에 개통 
현대는 1960년대 말부터 자동차, 중공업 등 중공업분야에 진출하면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현대가 그룹체제로의 변신을 시도한 것도 이 무렵이다. 현대 그룹은 1971년 1월 그룹회장 직제를 신설했다. 
이는 60년대 초반부터 설립해 운영해온 건설업 관련사와 함께 새롭게 진출한 자동차 등 이미 8개의 회사를 운영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경영구조가 요구됐기 때문이다. 
현대가 재계 정상의 기업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새롭게 이전한 세종로 사옥 시대인 70년대 중반부터다. 건설·자동차·조선을 주축으로 한 중공업체제의 구축이 완료된 시기다. 
1970년대 들어 현대는 조선사업에 진출해 중공업 기업군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70년대 국가정책과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현대는 발빠르게 국가 시책을 따라 가면서 재계 맏형으로 부상했다. 
이 같은 성장세는 매출액의 급격한 증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1971년 239억원이었던 매출액은 3년 후인 1974년에 1204억원으로 늘어났다. 
다시 3년 후인 1977년에는 1조3278억원으로 1조원대를 돌파했다. 현대가 매출액 10조원대를 돌파한 것은 1986년(12조199억원)이었고, 1999년에는 매출액이 97조원에 이르렀다. 
이는 오일머니를 움켜쥔 중동국가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건설 붐을 일어났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중동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일머니를 국내로 끌어들여 이를 다시 중화학공업 육성 재원으로 사용했다. 
현대건설의 중동 진출은 단순한 외화획득을 넘어 울산조선소 중흥을 통해 중공업 자생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자동차 산업은 해외 메이커와의 합작을 정리하고 독자모델 인 ‘포니’를 개발해 자동차 국산화와 수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았다. 
결과적으로 ‘토끼몰이’는 성공했고 건설, 자동차, 중공업 분야의 성장으로 기초소재인 철강과 금속 수요가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현대종합제철소를 설립 했다. 그러나 종합제철사업은 성공하지 못하고 인천제철, 대한알루미늄공업을 인수하는 데 만족해야했다. 
1970년대 초 8개에 지나지 않던 계열사가 70년대 후반 들어 30여개로 늘어 나는 등 몸집이 빠르게 불어났다. 
이는 건설, 자동차, 조선을 주축으로 관련 산업의 다각화가 이뤄지고 종합무역업, 해운업, 금융업 등 수출지원 부문에서 신규진출이 늘어난 결과다. 
1980년대 세종로 시대를 마감하고 계동시대를 연 현대는 자동차와 전자를 수출산업화하고 북방시장의 문을 열었다. 
1981년 정 회장은 대한체육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88올림픽 서울 유치에 성공했다. 
80년대 후반에는 북미시장에 대량의 자동차를 수출함으로써 얻어진 지명도와 정보력 등을 토대로 한․소 수교의 숨은 주역을 맡는 등 북방시장 개척에 선두에 섰다. 
1987년 고질적인 노사분규로 수출 실적 1위 자리를 내줬던 현대는 90년대 들어 정상을 재탈환했다. 
정 회장의 ‘인간중심의 경영철학’이 현장에 먹혀들었기 때문에 노사문제가 안정화 됐다. 
정 회장은 평소 “나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며 사원들과 어울렸다. 
젊은 시절에는 직원들과 씨름·배구 등을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신입사원 수련대회에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정 회장은 기술혁신과 산업고도화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 원천이 인재양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우수한 인적자원과 근면성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선발된 인재들에게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현대의 약진은 수출전략 산업에 집중 투자해 해외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최근 현대차의 사업 영역은 자동차와 자동차부품의 제조 및 판매ㆍ차량정비 등의 사업을 운영하는 차량부문과 차량 할부금융 및 결제대행업무 등의 사업을 운영하는 금융부문, 철도차량 제작 등 의 사업을 운영하는 기타부문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각 부문별 매출비중은 차량부문이 약 86%, 금융부문이 약 9%, 기타부문이 약 5% 정도 된다. 
정 회장이 일으킨 현대는 이후 현대자동차그룹을 비롯해 현대백화점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산업개발, 현대그룹, 성우그룹, 한라그룹, KCC, 현대오일뱅크, 비앤지스틸 등으로 분가 되면서 계열분리를 했다. 

정계진출 대권 도전했으나 고배 마셔 
1992년 초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정계진출을 선언한다. 정 전 명예회장은 정치를 개혁해서 선진한국, 통일 한국을 완성해보고 싶었다. 
정 전 명예회장은 통일국민당 창당 3개월 만에 31석을 차지해 원내에 진출했다. 5월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같은해 12월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188만표를 얻어 16.3%로 낙선한 정 회장의 숨통을 조여온 것은 국세청을 동원한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한 고강도 세무조사였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의 실패며 나라를 IMF 상황으로 몰고 간 YS의 실패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YS는 지난달 22일 서거했다.

 상훈 
1977. 10 대영제국훈장 코멘더장 
1978. 09 동탑산업훈장 
1979. 06 세네갈공화국 공로훈장 
1981. 04 국민훈장 동백장 
1982. 06 미국 골든플레이트장 
1982. 07 자이레 국가훈장 
1983. 09 중화민국 경성훈장 
1985. 10 룩셈부르크 월계관장 
1988. 02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 02 IOC 올림픽훈장 
1998. 03 노르웨이 왕실 공로훈장 
2000. 11 요르단 후세인왕 평화상 
2001. 02 러시아 친선훈장 
2001. 05 만해상 평화상 
2008. 08 DMZ 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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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가정신과 리더십

“이봐! 해봤어?”에 담긴 도전정신
억척과 고집으로 없는 길 개척해 나가

1984년 서산만 간척사업 공사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 그의 억척스러운 기업가정신을 대변하는 듯 하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 요체는 실천과 행동으로 요약된다. ‘알라신 도움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다’는 사우디 주베일항 공사에서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을 접할 수 있다.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만든 10층 빌딩 규모의 철골 구조물을 바지선에 매 달아 지구 반대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운반한 일은 업계 에서 ‘신화’로 남아있다. 조선소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정 회장의 결정이 있었기에 신화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정 회장은 억척스럽고 무모한 도전정신으로 조선소를 지었다. 
정 회장의 조선소 구상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단순했다. 집도 짓고 자동차도 만드는 데 배라고 왜 못 만들겠나 싶어 손을 댄 것이다. 조선소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에 날아 간 일화는 지금도 ‘신화’ 처럼 회자된다.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에서 현대그룹 총자산보다 많은 4300만불 대출을 요청했다가 퇴짜를 맞은 정 회장은 1971년 9월 영국 런던으로 날아간다. 
이미 시장에는 현대가 수십만톤 규모의 조선소를 만들 계획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더불어 그런 시공능력이 있는 지에 대해 회의론도 함께 따라 붙었다. 
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베트남전쟁 특수도 수그러들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특히 해외 건설경험도 살리고 장비와 풍부한 노동력을 살릴 수 있을만한 비교적 규모가 큰 사업거리를 찾았다. 
그게 바로 조선업이었다. 자그마치 총 800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정 회장은 자금 융통을 위해 런던에 있는 바클레이즈은행 문을 두드렸다. 해외건설 실적과 풍부한 우수인력, 입지조건 등을 앞세워 은행을 설득했다. 
당시 은행 부총재와의 대화는 ‘옥스포드유머’라고 이름 지어져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요약하자면 사업계획서 작성만큼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자신 있으니 검토를 마쳤으면 돈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면 옛날부터 조선강국이었다고 외국인들을 설득한 일화 역시 옥스퍼드유머 못지않게 잘 알려진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정 회장은 영국과 스위스 은행에서 1억달러의 자금을 빌리는 데 성공했고 우리나라 조선업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주춧돌을 세웠다. 
정 회장은 그 때를 “경제에 기적이란 건 따로 없다. 기업이란 현실이다.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똑똑 하다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 기업이 클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행동해야만 한다”고 회고했다. 
정 회장의 이같은 리더십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신적’이었다. 또 충만한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경영환경을 읽는 탁월한 혜안도 리더십의 한 축으로 몫을 다했다. 아산의 이러한 창업가, 기업가정신은 현재 숭실대학에서 교과목으로 개설돼 있다. 
정 회장은 자서전에서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시련은 있을 지언 정 실패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어록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란 자서전 제목이 됐다. 
정 회장의 개척가적 기질을 담은 말인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청년창업가들에게 시사하는 바 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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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家 사람들

재계 40대 그룹 안에 7개사 포진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같은 고향 강원도 통천 출신인 변중석(1921~2007) 여사와의 사이에 8남1녀를 뒀다. 

8남 1녀 子孫들 어떻게 성장했나 
장남인 정몽필(1934~1982)과 그의 부인 이양자(1943~1991) 여사는 정은희·유희 두 딸을 낳았다. 
큰 딸 정은희는 현대차그룹 계열 현대아이에이치엘(IHL)의 주현 대표와 결혼했다. 
작은딸 정유희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김지용(태아산업 최대주주)과 결혼해 김진석·진하 두 아들을 안았다. 
차남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이정화(1939~2009) 여사와 결혼해 성이·명이·윤이·의선 등 1남3녀를 뒀다. 
정몽구와 이정화의 큰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1985년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선호영(1925~2004) 박사의 아들 선두훈(대전 선병원 이사장)과 결혼했다. 선아영·동욱 등 1남1녀가 있다. 
둘째딸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은 종로학원 설립자인 정경진의 아들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정유미·유진·준 등 1남2녀다. 
셋째딸 정윤이 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는 신성재 전 현대하이스코 사장과 결혼해 신우진·우택·우현 등 세 아들을 뒀지만, 지난해 3월 이혼했다. 
외아들인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1995년 정도원 강원산업 회장의 딸 정지선과 결혼해 정진희·창철 등 1남1녀를 뒀다. 
정주영의 3남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일하던 우경숙(우호식 현대그룹 전 고문의 딸)과 결혼해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 등 두 아들을 낳았다. 
정몽근과 우경숙의 장남 정지선은 황산덕(1917~1989) 전 법무부장관의 손녀 황서림과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차남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은 현대차에 스프링을 개발·공급하는 자동차 부품 전문 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회장의 장녀인 허승원과 결혼해 3남을 뒀다. 
정주영의 유일한 딸인 정경희는 정희영 선진종합 회장과 결혼했다. 
1남2녀인데 외아들인 정재윤은 선진종합 부회장을 맡고 있다. 
큰딸인 정윤미는 박승준 이건산업 사장과, 작은딸 정윤선은 남영비비안 남석우 회장과 결혼했다. 
정주영의 4남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은 우울증을 앓다가 45세 때인 199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행자 여사와의 사이에 3남을 뒀다. 
정몽우의 장남인 정일선 BNG스틸 사장은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딸 구은희와 결혼해 정창현·진주·창민을 뒀다. 
차남 정문선 BNG스틸 부사장은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인 김선희와 결혼했다. 
현대BS&C 사장인 3남 정대선은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혼인해 2남을 뒀다. 
정주영의 5남인 정몽헌(1948~2003) 현대그룹 회장은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인 현정은 현 현대그룹 회장과 결혼해 1남2녀를 뒀다. 
정몽헌과 현정은의 장녀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는 신현우 전 국제종합기계 대표와 신혜경 서강대 명예교수 부부의 차남인 신두식과 결혼했다. 
현대상선에 대리로 근무 중인 차녀 정영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영학과와 와튼스쿨을 졸업했다. 
외아들 정영선은 현재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의 6남 정몽준은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딸인 부인 김영명과 결혼했다. 
장남 정기선은 현대중공업 기획실 상무, 장녀 정남이는 아산나눔재단 기획팀장, 차녀 정선이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만난 백종현씨와 결혼했다. 막내아들 정예선은 연세대 재학 중이다. 
정주영의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은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김혜영과 결혼해 딸 정정이, 아들 정경선을 두고 있다. 
8남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은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권준희와 결혼해 아들 현선, 딸 문이를 뒀다. 

정 회장 형제·조카엔 누가 있나 
정 회장은 부친 정봉식과 모친 한영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 정순영 전 성우그룹 명예회장, 정희영(한국프랜지공업 회장을 지낸 김영주의 부인),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신영 전 동아일보 기자,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동생들이다. 여동생 1명은 어릴 적 숨졌다. 
정주영의 바로 아랫동생인 정인영(1920~2006)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김월계(1923~2003)씨와 결혼해 정형숙(1951~1974)과 정몽국 엠티인더스트리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등 2남1녀를 뒀다. 
정몽국 회장은 이광희 전 한라대 총장과 결혼해 정지혜·태선·사라를 낳았다. 정몽원 회장은 아내 홍인화 전 TBC 아나운서와 결혼해 정지연·지수를 뒀다. 정주영의 둘째동생인 정순영(1922~2005) 성우그룹 명예회장은 박병임1928~?)씨와 결혼해 정문숙(1947~?), 정몽선 성우그룹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 정몽용 성우오토모티브 회장, 정정숙 씨를 뒀다. 
정순영과 박병임의 장녀인 정문숙 전 현대시멘트 고문은 故 김자응 씨와 결혼해 김태호를 낳았다. 
장남 정몽선 회장은 故 김미희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김씨는 1993년 10월 태릉 아이스링크 선수대기실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다. 
정 회장은 진영심 씨와 재혼했다. 
정 회장에게는 정재은·형선·예린 1남2녀가 있다. 
차남 정몽석 회장은 부인 안정해와 사이에 정정은·주은 두딸을 뒀다. 
3남 정몽훈 회장은 부인 박지영과의 사이에 정광선·임은·유은·윤선 2남2녀가 있다. 
4남 정몽용 회장은 인촌 김성수의 막내아들 故 김상겸 고려대 명예교수의 딸인 김수혜와 결혼해 정인선·호선 두 아들을 낳았다. 
정순영과 박병임의 막내딸인 정정숙은 개인사업을 하는 이주환과 결혼했다. 딸 이재인을 뒀다. 
정주영의 여동생인 故 정희영의 장남 김윤수는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이다. 김윤수의 장남 용석이 프랜지공업 계열사인 서한산업 자동차 부품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김윤수 회장의 차남 용범과 3남 김용준도 프랜지공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정희영의 차남 김근수는 울산화학 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이다. 
김근수 회장은 부인 허경과의 사이에 김용민·나연·보연·주연 1남3녀를 뒀다. 
정주영의 넷째동생인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부인 박영자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정세영과 박영자의 장녀 정숙영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인 노경수 서울대 교수와 결혼했다. 
노 교수의 동생인 노철수 아미쿠스그룹 대표는 삼성그룹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여동생인 홍라영 리움미술관 부관장의 남편이다. 
정세영의 장남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이자 현대상선 부회장을 지낸 김성만씨의 조카 김나영과 결혼해 정준선·원선·운선 3형제를 뒀다. 
정세영의 둘째딸 정유경은 김석성 전 전방회장 장남인 김종엽과 결혼해 김지수·연수를 자녀로 뒀다. 
정주영의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1962년 지병으로 숨졌다. 
서울대 음대 출신 첼리스트인 부인 장정자는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했다. 
장정자는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정신영과 장정자는 1남1녀를 뒀다. 딸 정일경은 미국 블룸버그대 회계학과 교수인 남편 임광수씨와 미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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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그룹의 변화

아산 타계 후 계열분리로 경쟁력 강화
잦은 경영권 싸움으로 국민 반감 초래

2001년 3월21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현대그룹은 격변기를 거쳤다. 
정 회장 사망 전부터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인한 계열분리가 진행됐다. 
2000년 3월과 5월 2차례에 걸쳐 2남 정몽구와 5남 정몽헌 형제간 후계구도를 둘러싼 갈등이 표출됐다.  
이를 계기로 현대그룹은 차남 정몽구 계열(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정공·현대캐피탈·현대오토넷 등)와 5남 정몽헌 계열(현대건설·현대상선·현대전자·현대아산·현대엘리베이터·현대기술정보·현대종합상사·현대증권·현대물류 등), 6남 정몽준 계열(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로 분리됐다. 
3남 정몽근이 금강개발, 7남 정몽윤이 현대해상화재, 8남 정몽일이 현대기업금융을 물려받았다. 
계열분리는 주로 몽헌계 계열사들의 유동성 위기를 초래했다. 
외환위기 후유증과 건설경기 악화, 반도체경기 불황 속에 정 회장이 사망하고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으로 인한 적자까지 불어났다. 
대북송금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정몽헌 회장은 2003년 8월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현대그룹은 또 한 차례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현대그룹 지주회사 역할을 하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두고 정몽헌 회장의 장모이자 대주주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과 정몽헌의 삼촌인 정상영 KCC 회장이 경영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고 결국 2004년 2월11일 금융감독위원회가 KCC에게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면서 분쟁은 종식됐다. 
그러나 2006년 6남 정몽준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사전 협의 없이 매입한 ‘시동생의 난’, 2010년에는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간 현대건설 인수전 등이 이어졌다. 
이처럼 그룹이 쪼개지면서 외형상 규모가 작아지고 재계 서열이 낮아졌지만 각 계열이 전문그룹의 길로 나서면서 경쟁력이 강화되고 동반 부실의 위험은 줄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정주영의 차남 정몽구는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그룹,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그룹, 3남 정몽근은 현대백화점그룹 등을 키워냈다. 
故 정몽헌의 부인 현정은 회장도 현대그룹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역부족인 모습이다. 
3세 경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정몽구의 외아들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을 비롯해 정몽근의 장남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주영의 4남 정몽우의 장남인 정일선 BNG스틸 사장 등이 활약하고 있다. 
정주영의 아들들 외에도 KCC그룹, 현대산업개발, 한라그룹, 성우그룹 등 정주영의 형제들이 만든 그룹들도 독자영역을 굳히고 본격적인 3세 경영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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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기념행사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풍성
현대百․울산博 등 기념주화도 만들어 나눠줘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20일부터 말일까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서 현대백화점은 100주년 특별 기념품으로 ‘정주영 주화’와 ‘정주영 기념 우표첩’, 만화 ‘정주영’ 등 3종을 총 1600명에게 무료 증정했다.

현대백화점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진 현대 창업주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를 마련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20~ 29일 현대백화점 전국 15개 점포에서 ‘아산백년, 불굴의 개척자 정주영’ 특별 기획전을 개최했다. 
현대백화점은 특별 기획전을 통해 정주영의 경영철학을 기리고 국민 모두가 어려운 경제상황을 함께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행사를 준비했다. 
이번 행사는 기념특강과 사진전, 특별 기념품 증정 등 다양하게 진행됐다. 
우선 22일부터 압구정본점 등 4개점(압구정본점, 무역센터점, 신촌점, 미아점)에서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주제는 ‘창의와 도전을 일깨우는 이야기’와 ‘창의와 도전, 20세기 한국을 일으킨 거인 : 21세기 한국을 이야기한다’ 이다. 
김구한 박사와 이동식 박사 등 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연구교수가 ‘아산 정주영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생전의 도전정신과 사업보국 철학’ 등을 사진과 영상을 곁들여 소개했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10층 문화홀에 1000㎡ 규모로 아산 정주영의 생전 철학과 어록, 사진 및 영상 등 기념사진전도 열렸다. 
이와 함께 100주년 특별 기념품도 선보엿다. 현대백화점은 아산 정주영 100주년 기념 ‘정주영 주화’와 ‘정주영 기념 우표첩’, 이현세 만화 ‘정주영’ 등 특별 기념품 3종을 특별 제작해 고객 응모 통해 총 1600명에게 무료로 증정했다. 
특히 ‘정주영 주화’는 아산 정주영의 생전 모습을 담은 순금(순도 99.9%) 주화다. 5돈(18.75g) 중량의 주화와 원목 케이스로 구성됐다. 총 100명 분을 한정 생산 했으며 제작기간은 1개월 가량이 소요됐다. 
울산박물관은 지난달 25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기획전시실 에서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불굴의 의지와 도전’을 전시한다. 
특별전시는 울산박물관, 울산대학교 대학기록관이 공동 주최하고 울산상공회의소,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울산대학교가 후원한다. 
지난달 25일 오전 11시 울산박물관 로비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김기현 울산시장, 이채익 국회의원, 전영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 윤갑한 현대자동차 사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꾼 그의 일대기와 울산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마련한 기업가 정신 및 울산에 대한 사회적 공헌 등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주요 전시 내용은 1전시실에서 ‘아산 정주영의 출생과 한국 경제의 발전’이란 주제로 아산 정주영의 출생과 성장, 도전과 성공, 그리고 올림픽 유치활동, 소떼몰이 방북, 아산사회복지 재단 설립 등의 활동상을 살펴볼 수 있다. 
2전시실에선 ‘세기의 경영인 정주영, 울산 그리고 인간 정주영’이란 주제로 정주영과 울산 인연의 시작, 현대자동차 설립, 포니의 탄생 비화 등 현대와 울산의 자동차 발전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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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식

“선친 뜻 이어 받아 세계로 도약하겠다”
정몽구 회장 가족대표 인사말…각계 인사 500명 참석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서 가족대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으셨습니다. 저희 자손들도 선친의 뜻과 가르침을 이어받아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24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아버지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을 회상했다. 
가족 대표로 단상에 오른 정 회장은 짧은 인사말에도 목이 멘 듯 울먹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15년 11월 25일 태어나 탄신 100주년을 맞았다. 2001년 작고했다. 이에 앞서 그는 이날 오후 5시 아들 정의선 부회장과 함께 1시간 전에 기념식장에 와서 현장 준비 과정을 꼼꼼히 점검하며 정성을 기울였다. 
이날 기념식에는 정홍원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전 국무총리)을 비롯해 이명박 전 대통령,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정·관·재계 및 언론계·학계·사회단체 관계자, 정몽구 회장 등 범현대가와 임직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3시30분께 행사장에 도착한 정 회장은 약 한 시간 뒤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도착하자 직접 호텔 밖으로 나와 마중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약 10분간 함께 ‘아산 정주영 회장 기념 사진전’을 관람하며 고인을 추억했다. 
정주영의 차남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정주영의 막냇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정주영의 6남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주영의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전 국무총리인 정홍원 기념사업위원장 등이 행사장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주요 인사는 재계 출신은 허창수 전경련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등이었다. 
정·관계에선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의원과 박영선 전 원내대표 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이근면 인사혁신처장, 김기현 울산광역시장,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백용호 전 국세청장 등이 참석했다. 
외교사절로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 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대사 등 각국 대사들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정홍원 기념사업 위원장의 기념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축사, 기념 영상 상영,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회고사, 정몽구 회장의 인사말로 진행됐다. 
정홍원 기념사업위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아산은 전후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처음부터 중후 장대형 생산기업으로 사업을 펼쳤고 가장 먼저 해외시장을 개척한 한국 경제의 선구자였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도전을 계속해 온 아산의 의지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좌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1월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서 열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축사에서 “정주영 회장이야말로 ‘대한민국 1세대 벤처기업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정주영 회장의 불꽃 튀는 창의력과 끝없는 모험적 도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결국 성취해 내는 개척정신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 벤처시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진리“라고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던 그 시대에 정주영 회장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인이 이 땅에 났다 하는 것은 우리 경제계뿐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봐서 큰 행운이라고 본다”면서 “자신을 항상 부유한 노동자라고 표현했듯이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책임자와 같은 자세로 일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치열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 기업인들에게 큰 교훈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청년들에게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또 “정주영 회장은 살아 생전에도 큰일을 이뤘지만 보다 큰 업적은 정몽구 회장을 위시한 다음 세대 역시 그 정신을 이어받아 매우 검소하고 모범적인 기업인으로 성장했다는 것” 라면서 “ 주영 회장께서 못다 한 일은 오늘 남아있는 현대인들이 반드시 이루어 나가리라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념 영상에서는 사진, 영상, 육성, 어록, 내레이션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아산의 삶이 재조명됐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30여 년 전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함께 참여했던 ‘해변 시인학교’ 시절을 회고하며 “솔직하고 꾸밈없는 진실한 인간성을 보여주시고 어울려 함께 하시던 회장님을 기억한다”고 했다. 
박 명예교수가 고 정주영 회장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자 일부 참석자들은 감정이 복받친 듯 훌쩍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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