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정율성을 알았다.

2003년 9월경 동료직원인 정운영 선생으로부터 정율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 들었다. 정 선생은 2년 전 홍보실에서 근무했다. 그때 모 일간지 기자로부터 ‘양림동 태생인 정율성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정 선생은 정율성이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다는 사실만 알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 후 나와 같이 기획감사실 기획팀으로 인사발령을 받은 후 조심스럽게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알려 줬다. 나는 이렇게 음악가 정율성을 접하게 됐다.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선생을 알았을 때의 감격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뜻밖의 일이 또 찾아 왔다. 10월 기획감사실 체육행사로 화순 만연산을 등산하게 됐다. 산 정상에서 조선대학교 교환교수로 와 있는 잔샤오홍(占小弘) 교수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 연구원이라고 했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날 이후 지속적으로 점(占)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정율성을 아느냐”, “정율성 선생이 광주 출신인지 아느냐”등 이것저것을 알아 봤다. 점 교수는 현재 중국에서의 위대한 음악가이자 혁명가인 정율성의 고향이 광주인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것은 나 역시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광주출신이면서 중국음악을, 중국문화를 이끈 위대한 인물을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더구나 그의 고향인 광주에서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말인가. 정말로 우리의 선배가 중국 대륙의 문화를, 그들의 사고를 이끌었단 말인가?

이것은 나에게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주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율성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에게 전한 첫 번째 사건이 됐다.

정율성의 고향은 양림동이었다

점 교수는 이후 나에게 선생의 부인과 딸이 거주하는 중국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면서 사실 너무 흥분되어 몇 마디 하지도 못했다. 나의 중국어 실력으로는 대화가 사실 불가능했지만 겨우 서울에 살고 있다는 언니 박의란 여사(선생의 누이 봉이의 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박의란 여사는 정율성 사업을 마음으로 추진하고 싶어 했고 이후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박의란 여사로부터 전대 신정호 교수의 연락처를 알았다. 정 선생과 신정호 교수 그리고 나는 정율성 선생을 광주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2003년 12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약 3개월간 정율성 선생의 행적을 찾아다녔다. 그의 출생지가 광주 양림동 79번지라는 것과 출생년도가 지금까지 알려진 1918년이 아니고 1914년생이라는 것, 그리도 정말로 위대한 음악가이자 대중과 함께 한 혁명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나를 완전히 매료 시켰다.

 

정율성을 사십시오.

정 선생과 나는 정율성 선생을 살리기 위한 기본계획으로 ‘음악가 정율성 기념사업추진(안)’을 수립했다.

주요 계획을 보면 학술대회 개최(2004년 5월중), 자료 열람 코너 운영(학술대회 개최 후), 추모음악회 개최(2005년) 등으로 단기 계획과 정율성 기념관 건립, 중국영사관 유치, 국제음악제 개최, 관련 도시와의 자매결연 등이었다. 이 거대한 계획의 첫 번째 사업은 학술대회 개최였다. 실제 학술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던 중 장애물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이데올로기의 관문이었고 두 번째는 간부진의 설득이었다. 이데올로기라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2004년 3월말 국가정보원 관계자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의 계획이 무리가 없다면 협조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그의 대답은 냉담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일단 우리 계획을 한번만 봐 달라고 사정을 한 후 계획서를 보냈다. 그는 우리의 계획서를 본 후 준비를 정말 열심히 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구청장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단 암묵적인 찬성의 표현으로 받아 들였고 첫 번째 관문인 사상 문제를 정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두 번째 관문인 간부진의 설득이었다. 2004년 4월초 계획서를 검토한 기획실장님은 우리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또 다른 주요 간부진들은 여전히 냉담했다.

어느 간부회의 날 기획실장님은 우리가 확보하고 있던 선생을 소재로 제작 방영한 MBC 시사매거진2580(북경아리랑)의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가 전 간부진이 시청토록 했다. VTR를 시청한 후 간부진들의 마음이 돌아섰다. 결정적인 두 번째의 관문도 이렇게 해서 통과했다.

첫 번째 계획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최소 2,000만원에서 최대 5,000만원의 예산이 필요했다. 필요한 사업비를 구하기 위해 정 선생과 나는 기본 계획서를 가지고 시청 관광과와 문화예술과를 찾았으나, 사상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해 관련 과에서의 설명은 포기하고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J문화관광국장을 직접 찾아 갔다. J국장은 그 가치를 알고는 있었다. 그는 이미 관광과에 추진을 타진해 보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했으나 여전히 문제는 사상이었다. 예산담당관실에 근무하는 직원을 만나 내용을 설명했으나, 쉽지 않다는 말만 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정율성에 관심이 많다는 광주 MBC TV제작부 L부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제는 든든한 지지자가 된 구청장님께서 분주히 움직여 시로부터 특별 교부금 5,000만원을 확보하였다. 결국 우리는 정율성을 파는데 성공했다. 최초의 판매금액은 5,000만원이었다.

 

고향에서 다시 태어나다.

이제 정율성 팀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 했다. 신정호 교수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거의 미쳐 있었고, 정 선생 또한 뚜렷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날짜를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날짜로 약 두 달 정도 후인 6월 11일을 D-day로 정한 후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주요 행정적인 계획은 나와 정 선생이 수립하고, 신정호 교수는 학술적인 준비와 초청자 관련 문제를 해결했다.

허징즈(賀敬之) 전 중국문화부장관, 선생의 부인 딩쉬에송(丁雪松)여사, 선생의 딸 샤오티(小提),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의 박준희(조선족) 감독, 연변 조선족의 석학인 유연산(조선족), 최삼룡(조선족)등의 초청을 결정하고, 신정호 교수가 섭외를 시작 했다.

섭외 하던 중 허징즈 전 장관의 요청으로 대만의 천잉전(陳映眞) 중국사회과학연구원종신원사 부부와 쩡젠민(曾健民) 중국사회과학연구원장 부부가 추가로 초청대상자로 결정되었으며, 허 전장관의 부인인 커옌(柯巖, 중국의 저명 작가)도 초청하기로 했다.

또 샤오티의 요청으로 중국 중앙교향악단의 리추지옌(李初建)과 청옌(程艶), 민족가무단의 최화(崔華, 조선족)도 공연을 위해 초청하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기대에 찼다. 계획이 결정되고 우리의 계획에 대해 4월 17일 광주타임스를 시작으로 지역 신문사들은 보도를 시작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첫 단추를 끼웠다. 이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조국에서의 행적을 찾아 다녔다. 많은 사실을 알았고, 어쩌면 중국에서도 모르고 있으며 많은 전문가들이 모르고 있는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정율성! 그는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뜻을 대변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중국인민해방군가, 연안송(延安頌),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다.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행사를 한번 추진 해보겠노라고, 정말 뜻 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이틀 남았다. 그 사이 광주의 언론과 학계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연일 신문지상에 정율성을 알리는 기사가 나왔다. 정율성은 새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인 허징즈(賀敬之)선생이 이곳에 온다. 그를 흠모하는 많은 국내외 많은 석학들이 모인다. 새로운 또 하나의 시작이다.

결코 일은 이곳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나의 북극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중국을 알고 싶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이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은 욕심뿐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2004년 6월 9일.

글/ 강양신(광주광역시 양림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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