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리키면 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세치 입을 놀리기 일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다. 내 욕구에 의해 선택한 종교는 아니지만, 태어나면서 세례를 받았다. 정약용 후손이니 역사도 깊다.

결혼 또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의 ‘계산성당’에서 했다. 6월 26일인데 웬 바람이 그렇게 부는지, 내 면사포가 바람에 만장처럼 펄럭였다. 바람은 불고 햇살은 뜨거웠다. 성당 마당에서 찍은 결혼사진은 신랑 신부 뿐 아니라 하객들까지 모두 찡그리고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샛바람이 내 결혼 생활의 불길함을 알리는 전령이었나 싶을 때가 있다.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 갇힌 기분이었다. 대화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남편은 새벽별 보고 나가 새벽별 보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종일 어린 아들과 대학을 다니는 시동생과 시누이와 생활했다. 아침에 남편을 보내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냈다.

종일 내 영혼은 구천을 떠도는 허깨비 같았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런 거였구나. 나라는 개별적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의심 혹은 불화를 종교가 아닌 ‘문학’에서 찾으려 했다. 내 욕구에 의해 선택한 종교가 아니어서인지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지 않았다. 언제나 삐딱한 자아는 삶과 불화했다.

그 삐딱한 자아와 치열한 싸움 끝에 겨우 하나의 깨달음을 얻고는 했다. 그 깨달음의 결정체가 책을 한 권씩 출간하는 거였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집을 짓듯 문장으로 집을 짓고 나면, 나름대로 손톱만큼 쯤 삶과의 어설픈 화해를 하고는 했다.

그러나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문학은 내게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생활이 어려워지자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라 했던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평정심을 지키기 어렵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나온다.

문학이란 결국 정신의 가장 사치하고 허영에 찬 예술분야이라는 것만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은 0.6%도 되지 않는다. 채 1%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어찌 감히 0.6% 안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또한 베스트셀러가 되기란 로또복권 되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일 년에 책을 몇 권 사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나온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이다. 그 지푸라기는 종교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었다. 나는 무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이 언제 쯤 괜찮아질 것인가를 묻고, 묻고, 또 묻고 다녔다. 굿도 많이 했다.

눈이 펄펄 내리는 팔공산 골짜기에서 박수무당의 굿을 지켜볼 때면, 정신이 아득하여 여기가 저승과 이승의 회랑인가 싶기도 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을 하다 신내림을 받은 박수무당은 윗대 조바위를 쓴 자그마한 할머니가 남편을 도와줄 것이라 했다.

또 다른 무당은 장군 신장의 쾌자를 부적으로 주면서 장군신장이 나를 도와 남편의 사업이 잘 될 거라고 했다. 그 무당과는 강화도 바닷가까지 가서 굿을 했다. 소설가적 호기심 때문인지 굿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각설하고, 남편의 사업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아무리 ‘생굿’을 해도 벚꽃이 피지 않듯이, 아무리 굿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강남에서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봄날, 무당이 부적으로 준 장군신장의 쾌자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뒤로 돌아가 라이터로 그 울긋불긋한 나일론 쾌자를 태웠다. ‘주의 기도’를 외우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화학섬유는 마지막에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변했다. 나는 발로 그걸 땅에 묻었다.

그 길로 다시는 무당에게 가지 않았고, 매일 아침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일주일 쯤 매일 아침 십자가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했을 때, 꿈에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얀 수단을 입고 나타나 아들과 나에게 성수로 축복을 해 주었다. 그분은 1984년 방한했을 때 땅에 입맞춤을 한 분이다. 그 꿈 이 후 난 열심히 성당을 나갔다. 우리 집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또 성당 미사 참석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핑계가 많았다. 성당 미사 참석만 하면 신부님이 돈 얘길 끄집어냈다. 그 말이 거슬렸다. 신부님이 왜 저렇게 돈 얘기를 길게 하시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당 주차장 공사를 하기 위한 기금마련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마일드 하지 않는 신부님의 미사 집전 스타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성가대의 성가도 가식처럼 들렸다. 강론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아들이 힘든 시기를 만났다. 아들이 취직이 잘 되지 않았다. 그 동안 내 스스로는 ‘문학’에서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어 내 설익은 자아는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었지만, 아들에게 아무런 힘을 줄 수는 없었다. 남편은 IMF로 무릎이 꺾였는데 아들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분류되어 나름의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중이었다.

간절한 기도가 필요했다. 아침마다 기도는 하지만 주일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고백성사’를 봐야하는 게 참으로 힘들었다. 내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 같았다. 죄를 고백한 후 그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성령’을 받아 철야기도에 강의를 다니는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얘기했더니, 율법이 없으면 인간은 죄인인줄 모른다. 죄를 통해 하느님을 알은 거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에서 율법을 다 지키기란 어렵다. 율법에 너무 묶이지 마라. 인간도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신(誠信)하면 네가 해방 된다, 고 말해 주었다.

늘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성당의 계율과 형식을 단번에 뛰어 넘을 수 있게 해준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 친구도 그 친구 나름의 혜안으로 내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분심(分心)이 들기 시작했고, 성당을 가다 말다했다. 여전히 신부님의 미사 스타일이나 강론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성가대의 성가는 길고 지루했다. 성당 주차장 공사를 한다고 온통 마당을 뒤집어 엎어놓은 것도 불편했다. 삐딱한 자아가 성당 오기 싫은 핑계를 잘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지면에 칼럼을 썼는데, 내가 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크게 깨달게 되었다.

난 달을 가리키는데, 내 글을 읽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깨달음이 오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신부님이나 성당 마당이나 성가대를 보러 성당을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다니. 신부님은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데 나는 그 성경 말씀은 보지 않고, 엉뚱하게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이 작은 깨달음을 얻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니. 인간은 결국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깨달음 이후, 성당 미사를 가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신부님이 얼마나 지극하게 미사를 집전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겨우 신부님과 혼자 화해하고 열심히 미사 참석을 하려하는데 신부님이 다음 주부터 성남대리구청으로 가신다고 했다. 나는 신부님(이용기 안드레아)과 이별의 악수를 하며 눈앞이 붉어졌다.

언제나 깨달음은 운명보다 한 발짝 늦게 쓸쓸한 이방인처럼 찾아온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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