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보위, 신영복 교수

신영복과  데이비드 보위,  그들의 죽음이 겹치는 이유

1월 11일과 15일 우리는 커다란 비보를 접했다. 글램록이란 음악 장르를 탄생시킨 영국 출신 가수 데이비드 보위와 우리 시대 지성으로 불린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의 부고가 그것이다. 고인들은 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 말고도 남긴 족적에서 짧은 순간 오버랩 된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삶이 맞닿는 지점을 찾아가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들이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 추억과 아울러 추모해 본다.

글 | 유성호 기자 

 

   가수가 채권을 발행 해?

‘보위 채권’으로 20세기 음악 산업에 혁신

발행 당시 美 제너럴모터스와 신용등급 같아

암투병 끝에 지난 10일 작고한 영국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팬들이 11일(현지시간) 그의 고향 브릭스톤에 있는 벽화 앞에 꽃다발을 바치며 애도하고 있다. 벽화는 지미 C 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영국 글램록의 선구자이자 20세기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고 데이비드 보위(1947.1.8.~ 2016.1.11)는 단순 음악가만은 아니었다. 음악이란 문화 콘텐츠를 기반으로 채권을 발행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이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음악 산업의 저작권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음악계에선 그를 “음악 사업의 판도를 바꾸는 데에도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재평가 하고 있다. 
1967년 데뷔한 데이비드 보위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과 패션, 연기 등을 통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의 혁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보위는 저작권이나 특허 등 비전통 자산에 기반을 둔 ‘에소테릭(Esoteric·소수만 이해한다는 뜻) 채권’을 최초로 발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외신에 따르면 18개월간 암 투병 끝에 11일(현지시간) 사망한 데이비드 보위는 1997년에만 5500만달러(약 664억5100만원)에 달하는 15년 만기 ‘보위 채권’을 발행했다. 

5500만달러 규모 발행 
그의 히트곡인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와 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 등에 기반을 두고 음반 판매 로열티를 담보로 발행한 ‘보위 채권’은 당시에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A3로 평가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의 GM과 같은 등급이다. 
보위는 채권 발행으로 마려한 자금으로 자신의 인터넷 서비스 ‘보위넷(BowieNet)’ 등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다. 1998년 북미 지역에서 음반을 출시했을 때 다른 회사보다 빠른 다운로드 속도를 제공하고 이용자들에게만 보위의 노래에 접근하도록 허용했다. 
‘보위 채권’의 신용등급은 인터넷 불법복제로 음악업계가 고전하면서 2004년 정크본드(투기등급 부실채권)보다 한 단계 위인 Baa3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당시 음악산업에 파격적인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영국 트웬티포 자산운용의 롭 포드 자산관리자는 “보위 채권은 그의 음악과 같이 획기적이었다”라며 “수많은 예술가가 그의 행보를 따랐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자산투자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제임스 브라운과 로드 스튜어트, 아이언 메이든, 밥 딜런 등 최고의 예술가들이 보위를 이어 줄지어 ‘에소테릭 채권’을 발행했다. 
보위의 금융증권화 과정을 주선한 데이비드 풀만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데이비드 보위는 사람들이 예술과 상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라고 말했다. 
한편 ‘보위 채권’으로 시작된 ‘에소테릭 채권’ 시장은 음악업계를 넘어 영화와 만화, 제약특허, 가맹점 영업권 등 각종 지적 자산에 적용되고 있다. 

“예술과 상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평가 
바클레이즈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발행된 에소테릭 채권은 400억달러(약 48조3920억원)에 달하며 올해는 450억달러(약 54조4410억원)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자산을 담보로 발행된 채권의 21%를 차지할 정도의 수치다.

 

   교수가 소주이름을 작명 해?

소주에 ‘처음처럼’ 서체 달고 출시

저작권료 고사 성공회대 장학금 1억원

지난 1월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성당에 마련된 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것이 소주 ‘처음처럼’이다. 신 교수의 호를 따 쇠귀체 또는 어깨동무체로 불리는 손글씨로 쓴 ‘처음처럼’이 소주 이름으로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 2006년 2월 두산주류BG(현 롯데주류)의 신제품 소주로 시장에 처음 선보이기 직전 2005년 가을께 신제품 개발을 마친 회사는 마지막으로 제품명 네이밍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 작업은 광고홍보전문업체 크로스 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맡고 있었다. 
손 대표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는 네이밍 전문가다. 더불어민주당도 손 대표 작품이다. 
평소 신 교수와 친분이 있던 손 대표는 ‘처음처럼’을 추천했다. 당시 두산주류는 한기선 사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한 사장이 진로 부사장 시절 손 대표에게 ‘참이슬’ 작명을 맡겨 ‘대박’을 냈기 때문에 다시한번 믿어 보기로 하고 ‘처음처럼’을 신제품 소주 이름으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손 대표는 신영복 교수를 찾아가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드렸고 신 교수가 흔쾌하게 승낙을 했기에 가능했다. 
신 교수가 승낙한 데는 서민들이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자신의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소주 서민술이라 동의” 
신 교수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두산 소주 네이밍 작업을 하는 후배에게서 ‘처음처럼’을 쓰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면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글씨를 사용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고민했었지만 처음처럼 글씨체가 서민들을 삶을 표현하는 ‘민(民)체’이고 소주도 서민적인 술이기 때문에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저작권료도 받지 않았다. 업체가 여러 차례 지불을 시도했지만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며 극구 사양했다. 
신 교수는 “글씨 사용료를 받는 것이 적절치 않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주변에 있는 교수들과 의논했다”면서 “공익적인 목적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결국 두산주류는 신 교수의 뜻에 따라 저작권료 대신 성공회대학교에 1억원을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했다. 
처음처럼의 등장은 소주이름 네이밍의 공식도 바꿨다. 산과 참이슬로 대표되는 1~3자 소주 이름과는 달리 4자를 사용해서 성공시킨 케이스다. 
이 이름이 채택되기 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는 “발음 쉽지 않아 경쟁력 떨어진다“는 지적이 일었다. 
지적은 소주 이름이 넉자나 되는데다 발음도 쉽지 않아 산이나 이슬 같은 이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처럼’이라는 차별화된 이미지에 두산은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뜻을 담고 있고 소주 타깃층이 신 교수의 책을 접한 25~35세라는 점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두산은 네이밍 컨설팅 업체와 사내 공모를 통해 1200여개의 새 브랜드 예비작을 수집해 최종적으로 ‘처음처럼’을 선택했다. ‘다음 날에도 처음 술을 마실 때처럼 개운하다’는 의미로 ‘처음처럼’을 사용하게 된 것. 
갓 출시된 ‘처음처럼’은 소주업계 돌풍의 핵으로 부상하면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두산주류의 이전 소주제품 ‘산’의 시장 점유율이 5%에 불과했는데 2006년 2월 ‘처음처럼’이 나온 뒤 불과 10개월만인 2006년 12월 두산주류의 소주시장 점유율은 두 배 이상인 12%로 뛰었다. 
이후에도 처음처럼은 성장을 거듭해, 현재 시장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처럼’은 출시 17일 만에 1000만병이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고 이는 참이슬 초기 판매 기록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처음처럼(http://www.soju.co.kr) 홈페이지 브랜드 스토리에 신제품 ‘처음처럼’이 신 교수 작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롯데주류 관계자는 “소주 처음처럼이 이처럼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데는 ‘처음처럼’에 담긴 고 신영복 교수님의 깊은 가르침과 친근한 이미지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지난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20여년을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처음처럼은 투옥 중에 신 교수가 쓴 글씨로 ‘더불어 숲’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 시대 아름다운 퇴장 
한편 빈민활동가 송경용 성공회 신부는 “나에게 있어 신영복 교수의 ‘글씨’는 철거민, 매 맞는 여성들, 산동네 빈민을 위한 작품이었다”고 고백해 화제를 모았다. 송 신부는 20여 년간 고인의 서예 작품을 팔아 빈민 활동에 쓴 성직자로 신 교수의 제자 1호다. 신 교수가 1989년 성공회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송 신부는 “약 20년에 걸쳐 노숙자들을 만날 때, 매 맞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갈 곳이 없을 때, 장애인, 빈자들이 있을 때마다 보금자리를 위해 고인이 글씨를 기탁했다”고 말했다. 
송 신부는 이를 서울 인사동 등지에서 팔았고 그 액수만도 1억5000만원에서 2억원 가까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 자금을 빈민활동 기금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신 교수가 노동활동가, 사회학자 등의 기금 마련을 위해 선뜻 건네준 작품이 부지기수다. 
송 신부는 “봉천동 산동네 철거민촌의 행사 때마다 글씨를 주셨다”며 “기증 작품에는 감옥에서 썼던 당신의 좌우명 등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서예에서 실패한 한 획은 다른 획의 도움을 받아 ‘어깨동무’하며 전진했다. 고인은 정적이고 귀족적인 ‘궁체’와 대비된 동적이고 담백한 필법을 지녀, ‘어깨동무체’라는 고유 서체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데이비드 보위와 신영복, 이들의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윤택함을 남겨 준 자본주의 시대 아름다운 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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