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갈림길에서 외면한 자아를 찾아

- 생각보다 썰렁한 뮌헨공항에 도착했다. 여기 이곳 뮌헨에 오는데 34년 걸렸다. S(Schnell Bahn : 고속철도)글자를 따라 고속철도을 탔다. 의외로 영어가 하나도 없네. 멘트도 영어로 안한다. 다른 나라사람들은 알아서 들어라 이거네. S를 타고 중앙역에 도착하니 왜 이리 복잡하고 구멍도 여러 곳에 숨었는지. 
- 또 물었다. 이 호텔에 가려한다. 어디로 나갈까?(독어로) 올라가서 왼쪽으로 돌아서 백 미터란다. 이 정도는 들리네. 휴 다행. 에덴호텔볼프. 이름이 뭐 순서가 저래? 그냥 깨끗하고 교통이 좋아서 잡았다. 
- 체크인하고 들어온 시간이 한국시간 새벽 한시반 정도. 목이 안 돌아가고 어깨가 무진장 아프네. 소금 덩어리인 기내식을 먹었더니 야밤에 갈증이 못 견딜 정도. 
- 화장실 욕조에 오랜 시간 그렇게 앉아서 여기 내가 왜 온 거지? 크리스 노먼이 있어서? 오직 그것만은 아니다. 

내 친구 J가 뮌헨에서 보내온 문자메시지다. 그녀가 뮌헨에 도착해 겨우 호텔을 찾아 하룻밤 잔 다음날, 나는 청계산 산행을 했다. 
그녀의 문자메시지가 온건 산행 후 추어탕을 먹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 때 서울은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연일 두고 내리고 있었다. 
J는 여고동창이면서 대학도 같은 대학을 다녔다. 그녀는 공부를 잘했다. 성향은 간데없는 문과체질인데 공과대학을 갔다. 
사춘기 때 ‘전혜린 평전’을 읽고 남다른 삶을 살고 싶은 그녀는 공과대학을 지원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교육감이었는데 고도(孤島)에 부임했을 때 연탄가스중독으로 14년을 집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친 후, 뮌헨 공대에 입학허가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즈음 서독 간호사로 갔다 온 지인이 독일은 여자가 가면 ‘폐인’이 된다고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팔을 걷고 나서서 시집이나 가라고 종용했다. 그녀는 집안 분위기상 그만 선을 봐서 결혼을 했다. 삶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아를 외면했던 것이다. 
성격 고약한 공무원 신랑 만나 아들 둘 낳고 그럭저럭 잘 사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간암에 걸렸다. 큰 아들은 중학교 2학년, 작은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그 때부터 그녀는 거의 십년간 남편의 간암과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녀 덕에 남편은 십년 가까이 이 세상에 더 머물다 떠났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독어를 접고, 영어를 붙잡고 공부를 했다. 팝송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금은 여성회관에서 팝송 영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34년 전 뮌헨의 공과대학 앞에서 멈추어 있었다. 언제나 그 때 외면했던 자신의 자아와의 화해를 꿈꾸었다. 그 꿈을 실행에 옮기는데 34년이 걸린 것이다. 그녀가 크리스 노먼의 공연을 보러간다는 건 구실에 불과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 34년 전 네가 외면했던 네 자아와 대면하러간 거지. 34년 동안 외롭게 버려 놓았던 네 자아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회포를 풀고, 이제 그만 놓아 주어라. 뮌헨을 다녀오면 네 얼굴이 더욱 평화로워질 것 같구나…. 이 글을 쓰는데 내가 눈물이 나네. 서울은 가을비가 연일 내린다. 깊은 가을이다. 

등산복을 입은 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J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데, 눈물이 터졌다.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J의 삶을 잘 알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내가 외면했던 내 자아는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울컥했던 것 같다. 난 어느 시점에서 내 자아를 외면하고 이렇게 먼 길을 걸어온 걸까?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이런 날은 언제나 내 열아홉 살 겨울이 떠오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는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약사’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공부를 잘하는 내가 약사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중3 때 자율학습시간이면 몰래 빠져나와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어느 국회의원이 만든 재단의 학교였는데, 내가 입학할 때는 담도 없었다. 그러나 도서관은 있었다. 
중3 때 교실 바로 뒤가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복도를 포함한 교실하나가 도서관이었으니, 도서관치고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중3인 내가 볼 책은 차고도 넘쳤다. 도스토옙스키, 헤르만 헷세, 톨스토이, 헤밍웨이, 쇼펜하우어, 토마스만, 앙드레 지드, 스탕달….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없는 책들을 무자비하게 읽어 댔다. 
어릴 때부터 그림과 글짓기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상도 많이 받았다. 어릴 때는 막연하게 화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거였다. 그러나 중3을 지나 고등학교 때도 내내 문학 책들만 끼고 혼자 몽상에 잠기고는 했다. 
세상의 부조리에 눈 뜬 내 자아는 매일매일 외로움과 유한한 생명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 타협할 수 없는 삶의 죄악과 거짓과 위선에 대해, 어딘가에 토해내야 했다. 그 수단으로 나는 매일 글을 썼고,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살아 있는 듯했고 행복했다. 
고3이 되었을 때 어머님이 학교에 호출 되었다. 저대로 두면 대학을 못 간다는 거였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미술학원엘 등록했고, 결론적으로 지방의 사범대학 미대에 입학했다. 
그 겨울 난 그 지방대를 가기 싫었다. 나도 재수를 해서 오빠가 유학 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난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감히 말대꾸 한번 할 수 없는 절대적인 ‘파쇼체제’의 집안 분위기. 아버지 말은 곧 법이었다. 
집안은 아버지의 기분 여하에 따라 일희일비 했다. 내가 일차 지원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외삼촌에게 내가 다닌 대학에 원서를 내게 했다. 시험을 쳤고, 합격이 되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열아홉 살 때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한 번도 물어 본적 없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저 그 겨울 메마른 칼바람이 부는 동성로 거리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쏘다녔다. 
나는 그 칼바람 부는 동성로 거리에 내 자아를 버려두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의 단추는 잘못 채워진 것 같았고, 그 때부터 나는 삶과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가끔 열아홉 살의 내가 그 메마른 칼바람이 부는 동성로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환영을 본다. 
히틀러보다 더 무서웠던 아버지에게 그래도 목숨 걸고 한 마디 말해볼걸…. 왜 지레 짐작으로 아버지는 절대 재수를 시켜주지 않을 것이고, 서울로 유학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이렇게 열아홉 살의 내 뒷모습을 회환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이 글을 쓰라는 운명이었는지 알 수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도서관에 박혀 글만 썼다. 수업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대학 일학년 내내 도서관에서 쓴 단편이 ‘아내에게 들킨 生’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제목부터 웃긴다. 겨우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아내에게 들킨 生’이라니. 그 작품은 전국대학생 문예작품모집에서 소설 부문 당선작이 되었다. 문학이라는 올무에 한발이 걸린 것이다. 
누구나 ‘지천명’이 지난 어느 바람 자심한 날, 홀로 앉아 차를 마실 때면 운명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자아를 버렸거나 외면했던 일을 떠올릴 것이다. 운명의 갈림길 따위는 내 인생에 없었다고 하는 축복 받은 이는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아무튼, 내 친구 J는 34년 전에 외면했던 자신의 자아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녀가 부럽다. 뮌헨에서 돌아온 그녀의 큰 눈은 더욱 맑아 있었다. 그녀 덕에 나 또한 바람 자심한 날, 어설프게나마 열아홉 살 칼바람 부는 동성로 거리에 버려두고 떠나왔던 내 자아와 악수한다. “잘 가라 내 열아홉 살의 자아야, 이제 너를 떠나보내고 비로소 어른이 되려 한다. 고마웠다. 그 동안 너와의 불화를 화두삼아 내 내면은 키가 훌쩍 큰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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